이중섭 탄생 110주년 기념전시

쓰다, 텍스트 힙의 시대

by 무드온라이프


이중섭의 이번 전시를 보고 '역시 예술은 잔인하다'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만약, 그가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하지 않고 안온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면,

만약, 그가 전쟁으로 세상이 뒤바뀌는 혼돈과 궁핍을 겪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가 건강을 회복해서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가 대한민국의 21세기에 태어난 예술가였다면,

'만약에' 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에라는 가정이 다 이뤄졌다면 '우리는 지금의 이중섭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한 인간의 고뇌와 뜨거운 예술혼이 낳은 결과물이 훗날 누군가의 마음을 적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예술의 거부할 수 없는 속성일 것이다.

'쓰다, 이중섭 탄생 110주년 기념전시'는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 그의 '인생'을 마주하게 했다.


이중섭의 전시는 처음이 아니었으나 여러 차례 본 기억이 무색할 만큼 감회가 새로웠다. 이유는 엽서와 편지로, '쓰다'라는 명확한 주제로 작품들을 만난 덕분이다.

흔히 그의 대표작인 '소'에서 밖으로 뿜어내는 에너지를 읽었다면, 이번 전시는 절절한 그리움이 응축된 내면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다른 전시와 궤를 달리했다.


아담한 규모의 갤러리, 아트조선스페이스(ART CHOSUN SPACE)의 분위기는 전시의 성격과 잘 어우러졌다. 갤러리 전면에는 푸른색 벽면을 배경으로 큼지막한 쇼윈도가 자리 잡았다. 유리면에 적힌 '쓰다 이중섭 탄생 110주년'이라는 정겨운 글씨체가 고즈넉한 정동길을 가득 채웠다.

아트조선스페이스(ART CHOSUN SPACE) 쇼윈도. 이중섭 탄생 110주년 기념전시 필자제공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모든 텍스트가 귀해지더니, 급기야 '멋지다'는 의미를 더한 '텍스트 힙(Text Hip)'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온라인에서 손가락 하나로 온갖 감정을 쏟아내는 시대에 사각사각, 꾹꾹 눌러쓴 글자의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젊은 세대가 책을 읽고 소장하며 책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즐기는 흐름이 활발해진 지금, 이중섭 탄생 110주년 기념 전시 '쓰다'는 매끄러운 액정에 지친 현대인에게 따뜻한 위안이 된다.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의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지주였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다. 비록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와 형의 보살핌 속에 구김살 없이 성장했다. 이 시절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기억은 훗날 그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낙원'을 그리는 밑바탕이 된다.


민족정신이 투철한 오산학교 재학시절, 미국 시카고와 예일대에서 현대 미술을 전공한 엘리트 예술가 임용련을 스승으로 만난 것은 이중섭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스승은 제자의 재능이 낡은 관습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세계와 마주하도록 이끌었다. 이중섭은 그로부터 서구적 드로잉과 민족적 자의식을 동시에 배웠고, 이때부터 '소'를 그리는 데 몰입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스승의 인도로 더 넓은 세계를 향했던 그는 일본 문화학원 유학 시절, 운명처럼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난다.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조선인 청년과 일본인 여성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유학 시절의 그는 화가로서의 걸음을 쉼 없이 내디뎠다. 당시 도쿄에서 가장 앞서가던 미술 단체였던 '자유미술가협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 나갔다. 또한 오산학교 선배이자 훗날 민족적 서사를 담아낸 화가 이쾌대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창립하며,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 미술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다.


이번 전시의 첫 페이지를 여는 그 뜨거운 '엽서화'들이 바로 이 열정적인 연애 시절의 기록이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 엽서화는 통신수단을 넘어 연인에게 바치는 낭만적인 청춘의 송가였다. 초기 엽서화는 후기 작품에서 느껴지는 비극적인 정서와 대조적으로 경쾌하다. 상상력과 독창성을 담아 해맑은 소년과 소의 형상을 그려 넣은 그림들에는 순수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다. 이는 격동의 근현대사가 가져올 고통을 겪기 전, 화가 이중섭의 초기 조형 언어와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그가 보낸 90여 점의 엽서화 중 15점이 이번 전시를 통해 선보인다.

이중섭 '활을 쏘는 남자' 청년시절 연인 마사코를 향한 마음을 담은 엽서화. 1941 필자제공

1945년 해방 직전, 마사코는 홀로 현해탄을 건너와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원산에서 이중섭과 결혼식을 올린다. 이중섭은 그녀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뜻의 이남덕(李南德)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평생의 반려자로 삼는다.


유복한 환경에서 최고의 엘리트교육을 받은 이중섭에게 6.25 전쟁은 더없이 가혹하였다. 그는 전쟁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통영으로, 제주 서귀포로 피란을 떠난다. 좁은 방에서 온 가족이 게를 잡아 끼니를 때우는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이중섭은 이때를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아이들과 바닷가에서 뒹굴며 보낸 이 1년의 기억이 그의 작품 속 '아이들과 물고기, 게'의 도상이 되었다.

밥은 지었지만 반찬이 없어 늘 게를 잡아먹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게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훗날 마사코는 회상한다. 그러나 극심한 생활고와 부인 마사코의 건강 악화로 결국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는데 이것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이중섭, '어린이와 두 물고기' 1954 필자제공
이중섭 '닭과 게' 1954 필자제공

유복한 가문의 막내아들로 고생을 모르고 자란 이중섭에게 전쟁통의 극심한 생활고는 감당하기 버거운 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악조건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뜨거운 혼을 놓지 않았다. 뼛속까지 예술가였던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책임과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했다. 그 과정에서 감내해야 했던 주위의 차가운 시선조차 그의 몫이었다. 한 인간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타인의 잣대로 가늠하는 일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리움이 빚은 '쓰기'의 시간 (1952~1956)

이중섭에게 가족은 단순한 혈연을 넘어 그가 도달하고 싶었던 '낙원'이었다. 평안도의 풍요로운 유년과 서귀포의 짧은 행복을 잃어버린 그에게, 종이 위에 가족을 그려 넣는 행위는 현실의 결핍 속에서도 숨을 쉬게 하는 단 하나의 통로였다.

우리가 그의 편지 앞에서 발길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한 예술가의 기록이기 이전에 한 남자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직 가족을 다시 만나기 위해 그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쓴다. '곧 돈을 벌어 비행기표를 사서 가겠다', '우리는 반드시 곧 함께 살게 될 것이다.'라는 희망을 매일같이 편지에 담아 보냈다. 전시된 그 다정한 편지들은 사실 절망 속에서 길어 올린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중섭 편지화 헤어진 가족들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필자제공

편지화에는 일상을 나누지 못하는 가족들에 대한 절절함이 글자와 그림으로 가득하다. 문장의 끝은 늘 '아빠 중섭'이라는 서명으로 이어진다. 아이들과 대화하듯 글자도 삐뚤삐뚤하다. 마치 요즘 학생들이 정성껏 다이어리를 꾸미는 것 같은 아기자기함이 거장의 손에서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중섭 편지화의 해석 벽면 필자제공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은지화 전시 공간이었다. 재료를 구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 탓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은박지라고만 보기에는 그 안에 담긴 의미가 훨씬 깊다. 은박지에 뾰족한 철심으로 흠을 내고 물감을 채운 뒤 닦아내는 은지화 기법은, 도자기 표면을 긁어내고 백토를 넣어 구워내는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 닮아 있다. 은지화는 가난과 예술적 실험정신, 그리고 전통을 향한 그의 두터운 애정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미술 애호가였던 당시 주한 미 대사관의 재무관 아서 맥타가트(Arthur McTaggart)는 은지화에 깊이 매료되어 석 점을 구입한 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한다. 시대의 결핍을 예술적 성취로 승화시킨 은지화는 그렇게 세계적인 미술관의 벽면에 걸리게 되었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작은 은지화를 영상으로 크게 확대해 보여주고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은박지 위에 새겨진 가느다란 선들이 거대한 화면을 가득 채우자, 비로소 화가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날카로운 철심이 지나간 자리에 물감이 스며든 흔적,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물고기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세밀하게 살아났다. 육안으로는 놓치기 쉬운 은지화의 디테일을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중섭 전. 은지화 전시공간 필자제공

1955년 미도파 백화점 개인전이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수금 문제로 가족을 만날 자금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그는 극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을 당시 미술시장에서 그는 작품은 내어 주면서 대가로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화가는 가짜'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거식증과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표현이 제약받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은지화에 담긴 벌거벗은 아이들의 형상은 누드화로 오해받아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전시가 끝난 후 묵고 있던 여관에 돌아와 그림들을 태울 만큼 그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글자와 간간이 섞인 작은 드로잉이 빼곡하게 들어찬 전시 공간에서는 걸음이 한 번 더 느려진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은 다정한 편지화를 쓰는 시간이야말로, 그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나마 비껴갈 수 있었던 유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중섭 편지화 전시 테이블과 벽면 필자제공
이중섭 '꽃과 아이들과 물고기' 필자제공

갤러리 한 켠에서는 100년의 기록 속 이중섭의 아카이브를 전시하고 있다. 1955년 미도파화랑의 첫 개인전부터 불과 1여 년 후인 1956년 그의 부음 기사까지, 결정적 순간들을 담은 기록들이다.

조선일보의 이중섭 아카이브 소개 벽면 필자제공
이중섭 연보 필자제공

이른바 비운의 천재화가, 국민화가 이중섭의 연보를 보니 사람의 운명은 시대라는 거대한 그릇 안에 담겨있음을 절감한다. 아무리 '만약에'를 대입해 보아도 비켜가기 어려운 운명이 있었다.

다만, 짧은 생애를 처절한 외로움 속에 살다 간 한 예술가의 기록이 우리 곁에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죽음은 그가 살아온 치열한 시간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정신적인 방황은 병으로 깊어졌고, 곁에서 돕던 손길들마저 끊어진 채 홀로 병실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사흘간 무연고로 남겨졌던 그의 마지막은 지독히 고독했다.


그는 알았을까 100여 년 후 모두가 사랑하는 국민화가로 남게 될 줄, 그의 그림은 아무나 가질 수 없을 만큼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고, 그의 짧은 생애에 대한 기록이 이토록 촘촘히 남을 줄을 말이다.


주위의 모든 재료가 예술적 소재가 되었던 만큼 그의 작품에서는 어떤 위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번듯한 캔버스에 유화가 아닌 종이에 끄적거린 듯한 글씨와 소박한 그림들.

작은 엽서와 은박지에 새겨진 단출한 그림들이 전부다.


그는 예술의 형식보다 '무엇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몸소 답해주었다.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처절한 외로움과 고뇌를, 쉼 없는 실험정신으로 승화시켰노라고.

다정하고 담백한 그림 뒤에 숨어있는 뜨거운 예술혼은, 그가 남긴 거대한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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