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완성한다'는 정의는 어디까지일까.
붓을 내려놓을 때인가, 완성된 그림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었을 때인가, 혹은 조각품을 전시장에 옮겨놓았을 때인가. 예술작품을 두고 작가와 관람자 사이에 일어나는 교감은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을까.
전시 방법은 나날이 다양해지고 예술에 기술이 접목된 지는 이미 오래다.
예술가의 손을 떠났을지라도 관람객의 교감이 더해질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것, 그 미완의 여백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예술을 만나본다.
이러한 질문들을 내게 가져다준 두 작가에 대해 소회를 정리하고자 한다. 1편은 매끄러운 스테인리스 스틸의 반사를 통해 마침표를 찍는 제프 쿤스를, 2편은 빛과 안개, 얼음 같은 자연의 요소를 끌어들여 관람객과 공명하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세계를 따라가 본다.
1997년 도시재생 프로젝트 중 하나로 스페인 빌바오에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설계로 빌바오구겐하임 미술관이 세워졌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독특한 형태도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공공디자인작품으로 제프쿤스의 <튤립>이 미술관 앞에 전시된 것은 철강산업으로 쇠락을 길을 걷다 재생된 도시 빌바오를 한층 격상시켰다.
195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요크에서 태어난 제프 쿤스(Jeff Koons)는 가구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영향 아래 사물을 바라보는 감각을 익히며 자랐다.
자본주의가 풍요롭게 꽃 피우던 시절,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향유하던 소비문화와 일상의 상품들은 그에게 따뜻한 추억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러한 유년의 기억과 완벽에 대한 집착은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매탈을 만나 더욱 견고해졌다. 지문 하나 허용하지 않는 그 매끄러운 표면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조차 들지 않게 한다.
키치의 제왕 (The King of Kitsch), 예술계의 CEO (The CEO of Art)등, 제프쿤스에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화려하다. 1990년대 초반 <메이드 인 헤븐> 스캔들로 예술계에 엄청난 충격을 일으키는 등 그의 삶 자체가 스타성을 품고 있었다.
"예술은 사물(Object)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의 내면(Inside the viewer)에 있다" - 제프 쿤스
2014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 인터뷰
그의 예술적 뿌리는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에게 닿아 있다. '워홀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바로 제프 쿤스였을 것'이라는 평론가 유진 슈워츠(Eugene Schwartz)의 말처럼, 그는 일상의 사물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했다.
앤디 워홀이 '팩토리'를 통해 예술의 대량생산을 실험했다면, 제프 쿤스는 이를 한 단계 더 정교한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한때 백 명이 넘는 전문 인력을 거느렸던 그의 스튜디오는 흡사 예술을 제조하는 거대한 공장 같았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예술계의 CEO' 혹은 '상업주의의 화신'이라는 냉소적인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제프 쿤스의 작업은 시기별로 명확한 주제를 가진 시리즈로 나뉜다. 그 여정은 일상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전시장으로 불러들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더 뉴(The New): 1980년대 초, 새 진공청소기를 투명한 케이스에 넣어 전시하며 '새것'이 가진 무결함을 찬양했다. 소비사회의 욕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 초기작이다.
바날리티(Banality): 1980년대 후반, 대중문화의 저속한 아이콘을 거대한 도자기나 나무 조각으로 재탄생시켰다. 금박을 입힌 <마이클 잭슨과 버블즈>는 이 시기 '키치의 제왕'이라 불리는 그의 명성을 다진 계기가 되었다.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업이다.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풍선, 하트처럼 삶의 즐거운 순간을 상징하는 대상들을 거대한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했다. 빌바오의 <튤립>과 서울의 <세이크리드 하트>가 이 시리즈의 정점에 있다.
게이징 볼(Gazing Ball): 게이징 볼'은 원래 19세기 독일에서 정원 장식용으로 유행했던 유리 공이다. 쿤스는 이 소박한 장식물을 현대 미술의 맥락으로 가져와 '응시'와 '반사'의 철학을 담아냈다.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가운데 파란색 유리공, 게이징 볼이 놓여있다.
다양한 시리즈 중에서도 내가 주목한 것은 단연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이다.
반사를 통해 감상자는 물론, 주위의 사물과 풍경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교감이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리즈는 이혼 후 아들을 만나지 못하게 된 아버지가, 멀리 있는 아이에게 보내는 선물 같은 마음에서 시작되기도 하였다.
2011년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신관을 오픈하면서 6층 테라스 공간 '트리니티 가든'에 제프쿤스의 작품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번잡한 서울 중심의 테라스는 그 자체만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공간이다.
트리니티 가든 중앙에 전시된 <Sacred Heart 세이크리드 하트 >는 1994년부터 2007년까지 이어진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 시리즈 중 하나로, 전 세계에 단 5점(각기 다른 색상 조합)만 존재하는 귀한 에디션이다.
빌바오의 튤립작품부터 제프쿤스에 부쩍 관심이 갔었는데 직접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높이 3.7m에 이르는 거대한 보랏빛 하트는 마치 바스락거리며 부스러질듯한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하트'라면 '마음'이 아닌가. 그 위를 단단히 여민 금빛 리본은 거대한 금속 덩어리를 하나의 정중한 선물로 완성하고 있었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틸은 그 리본 덕분에 비로소 누군가에게 전해질 '마음'으로 포장된다.
적당히 짙고 어두운 보랏빛 곡면은 나를 둘러싼 배경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지 않아도, 왜곡된 거울은 내 뒤편의 풍경까지 눈앞으로 데려다주었다. 하트의 곡면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 모습과 서울 중심의 마천루를 감상하는 것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생소한 감각이었다.
그 매끄러운 표면 앞에서 마치 나와 반사되는 주위 풍경들도 작품의 일부가 된 듯, 작품과 내가 깊게 교감하고 있음을 느꼈다.
제프 쿤스를 세계적인 스타 작가의 반열에 다시 한번 각인시킨 전시가 2008년 파리에서 열렸다. 루이 14세의 절대권력이 응집된 베르사유 궁전의 <Jeff Koons Versailles> 전시다. 17세기의 권력 미학과 21세기의 소비 미학이 한 공간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바로크의 엄중한 권위와 팝아트의 가벼움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바로크 양식이 '신'과 '왕'을 향한 경외의 시선이었다면, 쿤스의 작품은 철저히 관람객인 '나'에게 몰입하게한다. <행잉 하트 Hanging Heart>는 거대한 거울이 되어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한 금박장식, 천정, 계단, 대리석 벽과 바닥그리고 다른 관람객들을 반사하며 보여준다.
엄격한 법과 질서의 상징인 궁전에 달린 하트(사랑)의 의미마저 연계성이 없어 보이는 낯선 공존의 전시다.
제프 쿤스는 관람객의 참여를 중시한다.
그는 작품의 반사광을 통해 관람객이 비로소 '공동 창작자'가 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철학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지점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 전시된 <Moon (Light Blue)>일 것이다. 부와 권력이 정점에 달한 이 공간에 또 다른 거울이 예술로 자리 잡은 풍경은, 그 자체로 깊은 의미를 발산한다.
거울로 뒤덮인 방에 걸린 또 하나의 푸른색 거울은 관람자가 발을 옮길 때마다 다른 장면을 시시각각 보여준다. 마치 만화경(kaleidoscope)을 돌릴 때마다 새로운 문양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시각적 유희를 선사한다.
베르사유의 거울이 과거의 권력 위에 현재의 우리를 비춰냈다면, 대서양 너머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에는 또 다른 거대한 거울이 놓여 있다. 쿤스가 궁전 내부로 끌어들인 반사의 미학은, 이제 도시의 광장으로 나와 하늘과 마천루, 그리고 수많은 인파를 한 몸에 받아내고 있다.
바로 건축의 도시 시카고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클라우드 게이트>다.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Millennium Park)는 단순히 잘 가꾸어진 공원이 아니라, 건축과 예술, 그리고 기술이 집약된 '21세기 공공 예술의 전시장'이다.
이곳은 일리노이 중앙 철도의 선로와 주차장이 있던 황량한 부지였다. 1990년대 후반 시카고시는 이 공간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2004년 마침내 문을 열었다. 도시의 흉물이었던 곳이 세계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공공장소 중 하나로 탈바꿈한 것이다.
철길과 주차장이 있던 거친 자리에 들어선 밀레니엄 파크는 이제 시카고의 거실이 되었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제이 프리츠커 펜실(Jay Pritzker Pavilion)의 유연한 스테인리스 스틸 지붕 아래로 음악이 흐르고, 스페인 작가 하우메 플렌자의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 속 LED 타워에서는 시민들의 얼굴이 빛난다. 아이들은 그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사이를 뛰어논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중심에는 인도 출신의 영국 작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클라우드 게이트>가 놓여 도시의 마천루를 투명하게 받아낸다. 168개의 스테인리스 스틸판을 이음새 없이 이어 붙인 이 거대한 조각은, 건축의 도시 시카고가 지향하는 공공의 가치를 묵직하게 웅변하고 있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직선의 마천루는 매끄러운 곡면 위로 쏟아진다. 사람들은 작품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그 표면에 비치는 자신의 실루엣을 즐긴다. 닫힌 공간을 나와 광장으로 확장된 이 거울은, 예술이 전유물에서 벗어나 삶의 한복판에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람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예술은
단순히 바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십여 년 전의 경험이 이토록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유를 되짚어본다.
시각을 넘어 몸을 움직여 얻은 감각은 기억에 더 깊이 새겨져 오래도록 머문다.
쏟아지는 이미지들이 찰나의 자극으로 소멸하는 시대에,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는 예술가의 고민일 것이다.
제프쿤스는 미완(未完)의 여백을 반사를 통해
오히려 넘치도록 채우며 마침표를 찍었다.
삶에서도 미완(未完)의 여백이 필요하고,
그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