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네틱 아티스트 최우람, 인간의 욕망을 설계하다.

by 무드온라이프


도구의 발명은 연약한 인간이 신체를 확장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망치와 손도끼에서 시작된 이 집요한 갈망은 이제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 단계에 이르렀다. 기술의 진화는 곧 인간 욕망의 크기와 궤를 같이한다.

올해 CES에서 목격한 아틀라스(Atlas)와 옵티머스(Optimus)는 그 진화의 정점에 선 휴머노이드였다. 휴먼 스케일의 로봇이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고, 섬세하게 손동작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안간힘을 쓰는 로봇을 보며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기계의 움직임에 나의 감각이 동기화되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2026 CES 좌:보스턴 다이나믹스의 아틀라스 출처:bostondynamics.com 우:테슬라 옵티머스 출처:tesla.com

우리는 평소 걷고 움직이는 행위가 얼마나 고차원적인 균형 감각의 산물인지 잊고 산다. 그러나 기계가 인체의 움직임을 힘겹게 흉내 내는 그 역설적인 순간, 나는 우리가 가진 신체의 완벽함을 비로소 깨닫는다.

첨단 기술의 집약체로부터 인체의 신비를 떠올리는 이 경험은, 자연스럽게 키네틱 아티스트 최우람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1970년대 서울에서 성장한 최우람은 로봇 만화의 전성기를 통과하며 움직이는 기계에 매료되었다. 엔지니어였던 할아버지와 화가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는 정밀한 기술과 예술적 감수성을 동시에 흡수했다. 이후 조소과에 진학한 그는 작품에 '시간성'을 부여하라는 과제를 마주하고, 유년 시절의 기억 속 로봇을 소환했다. 그것이 기계 장치를 조각의 재료로 쓰게 된 시작이었다.

그는 왜 인간이 이토록 기계에 의존하는지, 기계에 생명력이 깃든다면 어떤 모습일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이러한 철학적 질문은 그가 사용하는 금속 재료와 '기계 생명체(Anima Machine)'라는 개념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그에게 기계는 차가운 무기물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욕망과 꿈을 대변하며, 우리 삶의 모습을 투영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인류가 방향을 상실하지 않았던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
— 최우람(Korea Times 인터뷰 중)


최우람은 예술이 사회적 소통의 체계를 변화시키고, 인간의 마음을 상호 존중의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전시장 문을 나서는 사람들이 풍요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기를 바라는 그의 염원은, 오늘도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의 숨결 속에 녹아 있다.


쿠스토스 카붐 Custos Cavum : 잃어버린 세계의 숨결


어두운 전시장 한복판, 거대한 고래의 뼈대를 닮은 형체가 바닥에 낮게 엎드려 있었다. 라틴어로 ‘구멍의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이다. 차가운 금속으로 빚어진 이 기계 생명체는 실제 생명보다 더 생생한 리듬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나는 금속 뼈대가 내뱉는 육중한 기계음은, 마치 멸종해 가는 거대 신화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단명(短命)의 소리처럼 들렸다. 수십 쌍의 날개가 느릿하게 들썩일 때마다 전시장 전체의 공기는 미세하게 진동하며 무게를 바꾸었다.

쿠스토스 카붐 Custos Cavum 출처: www.uranus.or.kr

작가는 이 작품에 가상의 신화를 덧입혔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던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지키던 수호자가, 소통이 끊긴 현대 사회에서 서서히 소멸해 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뼈만 남은 몸체로 내뱉는 숨소리는 우리가 상실한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처절한 애도처럼 들렸다.


CES에서 본 휴머노이드가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듯, 이 기계 고래 역시 사라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불완전하고도 숭고한 움직임 앞에서 나는 묘한 위안을 얻었다. 기계가 생명을 필사적으로 흉내 낼 때, 역설적으로 우리가 가진 생명력의 완벽함이 비로소 목격되는 순간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LRaxPOBEbc

2015년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 등에서 전시될 당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소음과 진동의 항해, 에코 나비고(Echo Navigo)


'나는 항해한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나비고(navigo)'를 작가는 이 능동적인 움직임을 작품의 이름에 그대로 가져와 생명력을 부여했다.

2004년 지하철 1호선 성북역사에는 낯선 생명체가 걸려 있었다. 금속 뼈대와 투명한 날개를 가진 이 존재는 지하철의 소음과 진동을 먹고 자란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부산물을 에너지 삼아 진화한 가상의 기계 생명체다. 무선전화기 안테나 주위의 전파와 메아리를 먹고 산다는 설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뱉는 무수한 대화와 통화 중 들리는 정체 모를 잡음의 원인을 쫓던 이들이 마침내 발견했다는 서사와 맞물려 도시의 소란을 낯설고도 아름다운 예술적 호흡으로 바꾼다.

정교하게 맞물린 마디들이 움직이며 유연한 리듬을 만든다. 벽면에 비친 거대한 그림자는 차가운 역사 안을 깊은 바다로 바꾼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금속의 호흡으로 치환되는 순간, 무미건조한 지하철역은 신비로운 생태계가 된다.

에코 나비고(Echo Navigo)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협업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는 매년 한국 중진 작가 한 명을 지원해 대규모 신작을 선보이는 전시회다. 2022년의 주인공은 최우람이었다. 작가는《작은 방주》라는 타이틀 아래, 거대한 기계 생명체를 통해 현대 사회의 모순과 인간의 욕망을 투영했다.


공생의 무게, 원탁(Round Table)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의 높은 층고 아래, 거대한 검은 원탁이 놓여 있다. 탁자 위에는 하나의 머리가 굴러다니고, 아래에는 머리 없는 지푸라기 몸체들이 등을 맞댄 채 이를 떠받친다.

원탁 밑의 존재들은 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누군가 등을 들어 올리면 원탁은 기울고, 머리는 그 반대편으로 멀어진다. 하나의 목표를 향한 집단적 움직임이 역설적으로 목표를 더 멀리 밀어내는 형상이다.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쫓는 현대인의 끝없는 경쟁과 욕망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원탁(Round Table) 2022

천장에는 세 마리의 검은 새, '검은 새(Black Birds)'가 매달려 유영한다. 원탁 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사투를 내려다보며 느리게 날갯짓을 한다. 지상의 처절한 몸부림과 천상의 초연한 시선이 공존하며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원탁(Round Table) 세부 2022

정교한 기계 장치는 더 이상 단순한 구동에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구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굴레를 묵직하게 질문한다. 금속과 지푸라기라는 상이한 재료가 맞물려 돌아가는 이 거대한 생태계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사회의 단면을 비춘다.


작은 방주: 목적 없는 항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작은 방주》는 현대 사회의 모순과 구원을 향한 갈망을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담아낸 전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방주와 천사, 닻, 무한공간 같은 작품들이 한 시야에 담기며 마치 거대한 뮤지컬 무대처럼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듯한 장관을 이룬다.

함선에는 35쌍의 노가 달려 있다. 폐지 박스로 만든 노는 지배자의 화려한 날갯짓처럼 위용을 뽐내다가도, 이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낮게 잦아든다. 장엄함과 초라함 사이를 오가는 유연한 박자는 구원을 향한 열망과 그 이면의 허망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의 군무에 기묘한 감정이 서려 있다.


방주 위에는 등을 맞댄 두 선장이 앉아 있다.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이들의 손짓은 소통이 끊긴 시대의 초상이다. 작가는 이 방주에 구원을 싣고자 했으나 각자의 욕망이 충돌하는 공간에서 진정한 구원은 자리를 잡지 못한다. 배 위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갈등은 인류가 반복해 온 역사의 단면이다.

웅장하게 노를 저으면서도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함선의 움직임은, 목적지를 상실한 채 속도에만 매몰된 우리 시대의 단면을 비춘다.


노의 재료인 박스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버려지는 소모품이다. 작가는 소비사회의 파편인 하찮은 소재를 엮어 거대한 함선을 축조했다. 끝없이 생산되고 버려지는 폐지는 욕망이 지나간 자리의 부산물이며, 동시에 우리가 발 딛고 선 문명의 연약한 단면이다.

35쌍의 폐지 노가 거대한 군무를 춘다. 등을 맞댄 두 선장의 엇갈린 손짓은 소통이 끊긴 시대의 초상이다. 구원을 갈망하지만 욕망의 무게로 제자리를 맴도는 현대인의 굴레를 비춘다.
폐지로 만든 작은방주의 노

정박된 항해: 닻과 무한 공간


방주가 정면으로 응시하는 곳에는 두 개의 거대한 거울이 마주 보는 '무한 공간'이 있다. 거울 사이로 빛의 고리가 끝없이 이어지며 심연 같은 통로를 만든다. 방주가 도달하고자 하는 환영 같은 목적지이자, 결코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욕망의 끝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앞에는 무겁게 내려진 '닻'이 놓여 있다. 본래 배를 정박시키는 도구인 닻은 여기에서 나아가지 못하게 발을 묶는 현실의 무게가 된다. 빛의 통로가 무한을 향해 열려 있어도, 닻에 붙잡힌 방주는 제자리를 맴돌며 헛된 노를 저을 뿐이다. 이상을 좇지만 현실에 발 묶인 고단한 항해가 여기서 시각화된다.

거울 사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빛의 통로다. 도달하고 싶은 환영 같은 목적지이자, 결코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욕망의 끝을 상징. 선명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빛의 궤적이다.
닻. 나아가지 못하게 발을 묶는 현실의 무게다. 무한 공간을 향한 시선과 달리, 바닥에 깊게 박힌 채 이상을 좇으면서도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고단한 항해를 시각화한다.

상실된 구원: 천사와 사인 (Sign)


방주 뒷벽에는 날개를 잃은 듯 위태롭게 매달린 천사가 있다. 구원의 상징이어야 할 존재가 힘없이 축 늘어진 채 방주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풍경은 항해의 비극의 깊이를 더한다. 그 곁에는 붉은빛의 사인이 놓여 있다. 인체 형상에서 사방으로 뻗은 화살표는 현대 문명이 주는 피로와 혼돈의 상징이다. 모든 방향을 가리키기에 정작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이 붉은 신호등은, 구원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차가운 이정표이자 우리를 가둔 보이지 않는 벽이다.

날개를 잃고 힘없이 매달린 채 방주의 뒷모습을 본다. 구원의 상징이 무력하게 무너진 풍경은 항해의 비극성과, 찬란한 금속 빛깔은 몰락의 슬픔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인체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은 붉은 화살표는 혼돈의 신호등이다. 모든 방향을 가리키기에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마비 상태를 상징하며, 구원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차가운 이정표이다.

헌화, 삶과 죽음의 순환: 원(One)


전시는 이 모든 투쟁과 상실의 끝에서 한 송이 꽃을 피워낸다. 흰 국화 형상의 조형물 '원(One)'이다. 작가는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죽음의 시기를 통과하며 의료진의 방호복 소재를 사용했다. 시간이 흐르면 변형되고 바스러지는 재료를 통해 영원한 것은 없다는 생명의 유한함을 드러낸다.

기계의 숨 가쁜 움직임으로 꽃잎을 펼쳤다 오므리는 행위는 스러져간 이들을 향한 장엄한 헌화다. 웅장한 기계 장치들이 빚어내는 이 마지막 몸짓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삶과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순환의 일부임을 묵직하게 전한다.

원 (one). 코로나19 방호복 소재로 만든 흰 국화 형상의 조형물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스러져간 이들을 향한 헌화이자 애도다.

아래 영상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에 대한 작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작가는 기계와 인간을 분리된 존재가 아닌, 인간의 상상력과 욕망이 형상화된 하나의 덩어리로 바라본다.

https://youtu.be/ADZujy_FdSM? si=oAs9 aUOLKlxWNRGc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전시 인터뷰

작가의 초기 작업 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계생명체(Anima Machine)' 시리즈 중 하나인 '실바누스(Silvanus)'이다. 도시의 금속 구조물 사이에서 스스로 번식하고 살아가는 가상의 생명체를 상상하며 만들어졌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에 라틴어 학명을 붙이고 가상의 서사를 부여한다. '실바누스'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숲의 신에서 이름을 따왔다. 거대한 곤충이나 화려한 식물의 형상을 한 이 기계는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금속 날개를 움직이고 빛을 내며 숨을 쉰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모터, 그리고 정교한 CPU 회로로 이루어져 있다. 차가운 금속 재료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곡선 위주의 부드러운 형태와 섬세한 움직임은 관람객에게 생명체 특유의 신비로움과 경외감을 전달한다.

좌측의 살바누스와 우측 살바누스를 위한 드로잉

억눌린 내면, 핑크 히스테리아 (Pink Hysteria)


본래 봄의 철쭉은 부드럽고 따뜻한 분홍빛을 띠며 산천을 물들이지만, 최우람이 빚어낸 이 작품 속 분홍은 우리가 아는 그 화사함과는 거리가 멀다. 검은색 틀에 갇혀 어둠 속에서 LED 조명을 받아 기괴하게 번뜩이는 이 색채는 단순한 시각적 화려함을 넘어, 현대인이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내밀하게 품어온 불안의 실체인 '히스테리아'를 선명하게 증명한다.

산천의 철쭉은 제철이 지나면 자연스레 시들어 자취를 감추지만, 차가운 유리 상자 안에 박제된 이 플라스틱 꽃들은 영원히 시들지 않은 채 인공적인 빛을 내뿜는다. 시들지 않는 이 존재감은, 쉬지 않고 무언가를 쫓으며 스스로를 소진하는 우리의 피로한 초상을 닮아 있다. 정교한 조명은 살아있는 꽃처럼 보이게 해서 생동감을 불어넣어 차가운 기계와 살아있는 생명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허물어지게 한다.

PinkHysteria_2018.jpg Pink Hysteria, 2018. 유리 상자 속 시들지 않는 플라스틱 철쭉은 현대인의 집요한 강박과 욕망을 투영한다.

황금빛 날개, 알라 아우레우스(Ala Aureus)


어둠을 뚫고 뻗어 나간 줄기 끝에 노란 꽃봉오리들이 매달려 있다. <알라 아우레우스>는 기계적 정교함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탐미적인 지점을 보여준다. 앞선 작품들이 내면의 응축된 불안을 비췄다면, 이 작품은 스스로 빛을 내며 외연을 확장하는 긍정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

작가는 금속 마디마다 온기를 불어넣어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는 듯한 우아한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자연의 리듬을 닮은 이 움직임은, 인간의 기술이 예술적 숭고함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빛은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고, 바닥에 일렁이는 그림자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린다. 차가운 기계가 내뱉는 이 따뜻한 숨결은 기술의 끝이 결국 인간에 대한 위로여야 함을 보여준다.

이 황금빛 날개는 삶이라는 고단한 항해를 이어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고요한 응원이다.

AlaAureus_2017.jpg 알라 아우레우스(Ala Aureus) 황금빛 날개를 펴고 허공을 유영하는, 고대 신화와 현대 기술의 접점이다. 정교한 금속 마디의 움직임은 차가운 기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에필로그


그는 인간의 욕망을 설계해

우리의 한계 안에 갇힌 원초적인 두려움을 넘어서게 하였다.

정교하게 설계된 이 차가운 숨결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원래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나약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집요한 의지는

차가운 금속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우리와 동기화한다.


위태롭게 균형을 잡는 휴머노이드,

웅장하게, 더러는 고단하게 노를 젓는 작은 방주,

조심스럽게 꽃망울을 터뜨리며 피어나는 꽃들


고래의 흉곽이 움직이는 모습에서 생명의 호흡을 떠올리고,

조명 아래 흔들리는 가짜 꽃을 보며 산천에 흐드러진 철쭉을 생각한다.

기계를 통해 자연의 완벽함과 경이로움을 새롭게 발견하는 역설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본래의 존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기계의 차가운 금속 마디에서 생명의 온기를 발견하듯,

이제 일상의 풍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마주하고 싶다.


본 글의 사진 출처는 최우람 공식 웹사이트 (uram.ne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