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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어PD Nov 02. 2023

잔인하기보다 슬픈 영화 ‘더 플랫폼’

‘소유’ 한 사람은 절대 나누지 않는다

1980년대에 지구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모든 인간이 먹고도, 먹은 만큼이 그대로 남을 만큼 많아졌다. 하지만 세계 식량가격의 안정을 위해 남는 곡물은 모두 바다에 버려진다. 남는 곡물을 굶어 죽는 인간들에게 무료로 줬다간 곡물의 가치가 하락할 테고 가진 자들은 그 ‘손해’를 견디지 못한다. 그중에 간혹 기부등의 형태로 전해주려는 시도가 있으나 전달 과정에서 약탈되거나 중간에서 누군가 슈킹 해간다. 가진 자들은 손해를 메우고 누군가는 더 갖기 위해 1년이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수 정치인들이 하던 주장 중에 ‘낙수효과’라는 것이 있었다.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그들의 이익이 넘쳐서 중소기업과 일반 국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거란 이론이다. 그런 경제 이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는 게 혐오스러웠다.


최근에 본 넷플릭스 영화 ‘더 플랫폼’을 보면 낙수효과라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비인간적인지 느끼게 된다. 영화의 설정은 현실 계급을 은유한다. 수백 층으로 된 감옥, 각 층에는 두 명의 사람이 지내게 된다. 매 식사시간이 되면 전체 감옥에 갇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의 음식이 맨 꼭대기 층부터 주어진다. 음식을 숨겨선 안되고 정해진 시간 동안만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음식들이 그대로 한 층 씩 내려간다. 이것이 그 감옥의 ‘플랫폼’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설정은 한 달에 한 번씩 층이 재설정된다는 것이다. 1층에 있던 사람이 100층으로 갈 수도 있고 200층에 있던 사람이 1층으로 갈 수도 있다. 나는 이 설정이 일종의 현실 속 종교적 장치를 영화에 대입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 달에 한번 위로도 갈 수 있고 아래로도 갈 수 있으니 먹는 자원을 잘 배분해서 필요한 만큼만 먹으면 모든 사람이 살 수 있지만, 고층에 배정받은 사람들은 절대 필요한 만큼만 먹지 않는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남은 음식은 다양한 방법으로 더럽힌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존재다. 자원이 없으면 인간을 잡아먹기도 하고 자원이 남으면 가능한 한 독점하려고 하는 게 인간이다. 낙수효과란 관념에서나 가능한 말이지, 존재할 수 없는 이론이다.   

최소한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정치인’이라면 이런 말을 입에 담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렇게 분배하지 않고 독점하려는 인간의 심리가 바탕이 되어 생긴 제도가 계급사회이다.


계급사회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백, 수천 년 동안 인간 사회의 기본 틀이었던데는 이유가 있다. 분배가 어렵기 때문이다.  

원시시대에 두 명의 사람이 노루를 잡으러 갔다. 한 명은 화살을 쏘고 한 명은 노루를 유인해서 약속한 장소로 데려오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노루 사냥에 성공해 인간보다 큰 노루를 잡았다면 분배는 비교적 간단해진다. 노루를 반으로 갈라 나누면 된다. 두 명이 먹기에 노루 한 마리는 너무 많은 양이기 때문에 누구 하나 불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100명의 사람이 사냥을 해서 한 마리의 노루를 잡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00명이 먹기에 노루 한 마리는 충분하지 않다. 정확하게 100인분으로 나눌 수도 없다. 이러면 100명이 노루 한 마리 때문에 싸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힘을 합쳐 사냥을 했지만 분배 과정에서 100명 중 1/3은 죽거나 떠나고 가장 힘이 쎈 사람이 제일 맛있는 부위를 양껏 먹고 나머지 사람들이 나눠 먹는다.  

이렇게 분배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사냥을 할수록 조직의 경쟁력은 약해진다.  

해결 방법은 더 많은 노루를 잡거나, 누구나 수긍하는 분배 시스템을 갖추는 것인데… 모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노루를 많이 잡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은 대부분 악하고 이기적이라는데 수렴한다. 더 많은 노루를 잡기 전에 분배 시스템을 갖춰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다.


계급사회, 신분제도는 결국 분배를 위해 만든 사회 제도인 것이다.  

바로 ‘더 플랫폼’의 핵심이 분배이다.


인간은 대부분 악하지만 합리적인 부분도 갖고 있다.  

분배의 핵심이 평등이 아니라 공정이라는 점에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사냥을 하기 위해 망을 본 사람과 활을 쏜 사람,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서 몰아간 사람, 덫을 만들어 노루의 길목에 놓아둔 사람, 몇 시간이고 한자리에서 노루가 나타나는지 지켜본 사람, 잡아온 노루를 칼로 해체하고 요리를 한 사람, 노루를 잘 잡을 수 있도록 기도 한 사람. 누가 노루 사냥에 더 많은 역할을 하고 덜 했는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논쟁을 노루를 잡을 때마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100명의 사람들은 그들 중 가장 똑똑하고 공정할 것 같은 사람을 뽑아 분배를 맡겼다.  

‘당신은 우리보다 똑똑하고 심성도 바르니 정하는 데로 따르겠다.’  

물론 그렇게 뽑힌 사람이 정말로 똑똑하고 착해서 자신의 이익보다 사냥에 대한 기여도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나눠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처음엔 그렇게 했지만 노루를 계속 잡을수록 사람들 몰래 자기 몫을 더 떼어간다. 그리고 그 축적의 시간이 오래되면서 그 사람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렇게 계급이 생겨났다.


영화의 결말은 전체 메시지에 비해 허약하다.   

분배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신에게 인간성은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비유로 마무리된다.   

감독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봤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아이러니한 건 예전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낸 사람이 또 다른 계급의 정점에 올라, 더 강력한 계급사회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그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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