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오브 머니

: 돈을 의인화해 봤습니다. 뮤지컬 <캣츠>에서 영감을 얻었고요.

by 무글이

: 등장인물

1. 돈의 여왕 2.오만원 3. 만원 4.천원 5. 십원


몇 년 전 설 연휴가 끝나고 사흘째 되는 날.

돈의 여왕은 신권 추가발행을 선포하고 신권부활을 꿈꾸는 각종 화폐들의 대표들을 소집한다.

도나 서머의 <She works hard for the money> 흐르며 조명 밝아지면

돈의 여왕 궁전이다.

무대 뒤쪽 가운데 왕좌가 보이고 그 앞에서 만원이 천원에게 뭔가 얘기하고 있다.

이때 팡파르 울리고 화려하게 꾸민 돈의 여왕이 등장하여 왕좌에 앉는다.


여왕 : 설 대목에 이어 오늘 또다시 신권으로 부활하게 될 그대들을 생각하니 기쁘기가 한이 없구나.

만원&천원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여왕 : 그대들의 노고 덕분에 인간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평화로운 설날을.. 가만.. 근데 오만원과 오천원이 어찌 보이질 않느냐?

( 만원이 천원에게 눈치 주면 )

천원 : 예! 폐하. 그게.. 저어.. 오천원은 코로나로 인해 자가격리 중이고

오만원은 조폐공사에 잠깐 들렀다가 늦지 않게 오겠다고 했는데..

( 이때 등장하는 오만원. 한눈에 봐도 건방진 모습 )

오만원 : 좀 늦었습니다. 여왕폐하! 죄송합니다.

( 그 오만함은 여왕도 포기상태 )

여왕 : 괜찮다. 조폐공사에 갔었다고?

오만원 : (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 예! 아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부족한 거 뻔히 알면서도

물량을 자꾸 못 맞추면 어쩌자는 건지 나 참.. 치킨 몇 마리 사다 주고 싫은 소리 좀 하고 왔습니다.

여왕 : 그래. 요즘 네가 고생이 많구나.

오만원 : 그러게 말입니다. ( 만원 보고) 어이쿠! 세종대왕님!

설날에 많이 바쁘셨죠?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더 뛰어야 되는데..

만원 : 아니야! 별말씀을.. 일거리 만들어줘서 우리가 고맙지.

오만원 : 근데 아직도 축의금, 조의금을 삼만원 내는 인간들이 있다면서요?

뿌듯하시겠어요?

만원 : 에이~ 요즘 누가.. 그거 아주 가끔이야. 자네들 바쁠 때 우리가 다섯 장씩 들어가 주고 그러는 거지.

백봉투 못 본 지 꽤 됐어.

오만원 : ( 천원 보며 ) 이야! 이황 선생님은 생선 비린내 여전하시네요?

천원 : ( 당황하며 ) 냄새나? 세탁소 드라이한 건데..

오만원 : 괜찮습니다. 우리나라 시장경제의 상징이시잖아요.

작년 송년의 밤에 콩나물 대가리 반쪽 붙이고 오신 거 기억하시죠?

그때 여왕폐하께서 그거 보시고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

여왕 : ( 말 자르며 ) 자! 서로 인사 나누었으면 본론으로 들어가자.

고액권 순으로 오만원부터 얘기해 보거라.

오만원 : 예! 딴 거 필요 없고요. 그저 많이만 찍어주십시오.

곧 선거철이라 우리 애들 정신없습니다.

정치를 신용카드로 할 순 없잖습니까?

( 만원 보고 ) 세종대왕님! 왕년에 사과박스 많이 들어가 보셔서 이해하시죠?

만원 : ( 여왕 눈치 보며 ) 그.. 그럼.. 이해하지.

폐하! 시국이 이래서 봄이 와도 결혼시즌도 조용할 것이고

요즘은 다들 송금으로 대신하옵니다.

우선 선거가 급하오니 저희 쪽 신권 물량은 모두 오만원에게 양보하겠사옵니다.

여왕 : ( 답답한 듯 한숨 한번 쉬고 ) 천원도 동의하느냐?

오만원 : 에이~ 이런 중대사를 뭐 하러 천원짜리한테까지 물어보고 그러... ( 여왕의 경고성 눈빛 )

죄송합니다.

여왕 : 천원은 의견이 있으면 말하라.

천원 : 동의합니다. 폐하.

어차피 저희들은 신권으로 나가봐야 사람들이 돈 세기 불편하다고 뭐라 할게 뻔하고..

( 쓴웃음 짓다가 ) 다만 이번 설에 시장에서 근무하다가 다친 지폐들만이라도

새 생명을 베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만원 : 아이고~ 소식 들었습니다. 개한테 물린 분도 계시다면서요? 지폐가 개껌도 아니고 이거 뭐..

아! 아까 조폐공사 갔다가 들은 건데요. 몇 년 뒤에 천원짜리도 동전으로 만든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천원 : ( 겁에 질려 ) 뭐? 우릴 동전으로? 그게 정말이야?

오만원 : (재밌다는 듯 ) 왜 겁을 내고 그러세요?

최신 알루미늄에다 반짝반짝 폼나잖아요?

가만있자.. 앞면은 캡틴 아메리카 방패모양 어떻습니까?

아! 그럼 미국돈처럼 보일라나? 하하하하!

여왕 : ( 분노 ) 무엄하구나! 나도 모르는 일을 함부로 지껄이다니..

오만원 : 죄송합니다. 저는 아시는 줄 알고..

여왕 : 오만원은 잘 듣거라.

내가 인간 세상에 직접 관여하는 것도 싫고

네놈이 또다시 인간들의 정치놀음에 이용되는 걸 말리지도 않겠다.

허나! 만약 그것이 세상에 밝혀져 인간들의 미래를 혼란스럽게 한다면

거기에 연루된 금액 전액 회수하여 파쇄기에 갈아서 택배박스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오만원 : ( 무릎 꿇고 )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여왕 : ( 감정 삭히고 ) 일어서거라. 그럼 이번 신권 발행에 관해서 다들 의견이..

( 그 사이 누군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고 제일 먼저 발견하는 만원.)

만원 : 거기 누구냐?

( 허름한 차림에 몹시 지쳐 보이는 동전이다.)

십원 : ( 없는 힘 뽑아내듯 ) 여왕폐하께 인사드리옵니다.

여왕 : 넌 동전이 아니냐? 세상에.. 어찌 저런 몰골이..

액수조차 알아볼 수가 없구나. 대체 넌 얼마짜리냐?

십원 : 예. 저는 십원짜리이옵니다. 오늘 신권 발행을 해주신다기에..

오만원 : ( 가까이 가서 살펴보더니 ) 맞네! 십원. 난 에펠탑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다보탑이네요.

만원 : ( 버럭 ) 야 이 십원짜리야!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여왕 : 그만! 십원은 듣거라.

동전들은 지폐들의 회의가 있는 동안 오백원이 의견을 모아 따로 보고하기로 되어있느니라.

십원 : 아 그렇군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천원 : (쭈욱 지켜보다가) 자네 혹시..

작년 여름부터 성탄절까지 공중전화기안에 갇혀 있었다던 그 십원 아닌가?

십원 : 예. 그러하옵니다.

천원 : 역시 그렇구먼.

여왕 : ( 놀라서 ) 뭐라고? 아니 그럼 반년동안 그 안에 갇혀 있었단 말이냐?

천원 : 예. 폐하. 코로나 시국이다 보니 전화국에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지난여름에 고장인 거 모르고 들어갔다가 갇혔다 하옵니다.

오만원 : 이야! 추억 돋는구만. 공. 중. 전. 화. 요즘도 공중전화가 있나 봐요?

여왕 : 그 입 다물라! 근데 어떻게 빠져나왔느냐?

천원 : 작년 성탄 전야에 술 취한 10대들이 그 공중전화를 때려 부수는 바람에 다시 나왔답니다.

그때 함께 있던 동전들은 떨어져 구르다가 모두 하수구로 빠져서..

여왕 : 오~ 어찌 그런 일이..

만원 : ( 한심하다는 듯 ) 전자파 차단된다고 TV나 컴퓨터 앞에 깔아놓고

냄새 제거된다고 신발장 운동화 속에 넣어두고.. 참 드라마틱하네.

넷플릭스는 뭐 하나? 이런 거 영화 안 만들고..

오만원 :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런 분들 천 개 굴러오면 만원 아닙니까?

( 천원 웃음 터졌다가 만원이 노려보면 멈춘다.)

오만원 : ( 십원의 옷매무새를 성의 없이 만져주며 )

그러게 진작에 우체국 저금통이라도 찾아가시지 뭣땜에 이런 개고생이세요?

아니면 경주 다보탑 앞에 가서 관광가이드라도 하시든가..

혹시 압니까? 늘그막에 해외입양이라도 될지..

천원 : 다들 너무하는구만.

그래도 저 친구들이 이 나라 강산을 몇 번이나 바꿔 놓았는데..

오만원 :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나중에 동전되시면 두 분 손잡고 경로당 화투판에 함께 가세요.

천원 : ( 참다못해 ) 뭐?

여왕 : ( 홧김에 벌떡 일어서며 ) 그만두지 못할까?

십원 : ( 엎드리며 ) 죄송합니다. 폐하! 정말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여왕 : 아니다. 지폐라는 것들의 행태를 보니 내가 부끄럽구나.

오백원에게 따로 지시해 놓을 테니 물러가서 쉬고 있거라.

십원 : ( 울먹이며 )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 인사하고 돌아선다.)

여왕 : ( 뒤돌아 나가는 십원의 뒷모습을 보다가 ) 잠깐 멈춰라!

네 등에 찍힌 발행 연도가.. 천구백.. 칠십 년이냐?

천원 : ( 다시 되돌아와서 ) 예. 폐하. 저는 1970년생이옵니다.

( 오만원 빼고 모두 깜놀! )

만원 : 오 마이 갓!

천원 : 세상에 이럴 수가!

오만원 : 왜요? 70년생 동전은 나중에 잔돈 연금이라도 나옵니까?

여왕 : 인간들이 귀하게 여기는 희귀 동전 중에 하나가 1970년에 발행된 적색 구릿빛 십원짜리다.

돈으로 계산되는 값어치만 해도 네놈의 열 배가 넘는다.

오만원 : 예? 아니 길거리에 뒹굴어도 주워가지도 않는데 저런 게 무슨..

여왕 : 닥쳐라!! 돈을 액면 그대로만 따지는 너 같은 놈이 어찌 그 가치를 알겠느냐?

오만방자한 놈. 나가 있거라! 꼴도 보기 싫다.

( 오만원 두려움에 떨며 인사하고 퇴장.)

여왕 : 십원은 듣거라. 넌 일반 동전들과는 다르다.

인간들과 의논 후 결정해 줄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일단 한국은행으로 가서 쉬고 있거라.

십원 : 황공하옵니다. 폐하.

하오나 저는 그런 과분한 자리를 원한 것이 아니옵니다.

많은 돈을 받고 팔리기를 원하지도 않고 새 동전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 것도 아니옵니다.

여왕 : 그럼 여긴 어찌 온 것이냐?

십원 : ( 힘겹게 미소 지으며 ) 50년 넘도록 살아오면서 제 몸 하나 스스로 닦을 수 없어서

이렇게 더러운 몸이 되었습니다. 비록 이젠 쓸모없는 구리조각이지만 조금만 더 밝게 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전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서

동네 슈퍼 거스름돈도 되고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도 해주면서 살겠습니다.

그저 제가 십원이란 것만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시면 사람들도 오래오래 저와 함께 해줄 것이고

저는 그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여왕 : ( 가슴 먹먹하여 뭐라 말도 못 하고 왕좌에서 내려와 십원의 손을 잡고는 )

네 뜻 잘 알겠다. 네가 원하는 만큼 빛나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저 바깥으로 돌아갔을 때 네가 바라는 대로 세상이 널 대해줄지 모르겠구나.

(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 내 직접 가서 지시해 놓을 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

( 여왕 퇴장하면 만원도 남아있기가 어색해서 뒤따라 나간다.)

십원 : ( 나가는 여왕의 뒤에다 대고 ) 감사합니다.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 인사하다 어지러운 듯 주저앉는다. 천원 급히 와서 부축해 준다.)


둘 공감의 시선 나누면 뮤지컬 <캣츠> 주제곡 Memory 전주 천천히 흐르기 시작하고

둘 일어나서 첫 소절 부르려는 찰나 갑자기 음악 끊기고 지폐계수기 소리 크게 들린다.

마치 제조공장 돌아가는 소리처럼..

돈 세는 소리 일정하게 반복.

둘 마주 보며 허탈한 미소 짓고는 느린 걸음으로 퇴장.

암전.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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