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계약서 앞에서 작아지는 나

by 무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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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으로 살아 온지도 벌써 10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어야 하지만, 아직도 계약이 어렵다. 한창 바쁘게 작업중일 때, 계약서에 사인해야 되니 미팅을 하자는 매니저들의 콜을 귀찮게 생각했다. 그 귀찮음에는 두 가지의 함의가 있다. 첫째, 정말로 작업할 게 많아서 힘들고 바빠 죽겠는데 사인을 해야 한다는 점이 너무 귀찮았고, 두 번째로는 계약 내용이 제대로 이행될거라는 기대가 없었다. 똑같이 이야기해도 계약서를 들이밀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긴 공간에 이건 내 꺼, 저건 내 꺼 도려내는 느낌이 들었다. 나 같은 무명 프리랜서들은 고용주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불편함이 있으면 나를 또 안 쓰겠지? 당장 조금 손해 봐도 다음에 날 써줄 수도 있으니까. 계약서는 형식적인 문서일 뿐이지. 실제로도 일이 끝마칠 때면 "다음에 더 지원을 많이 받을 테니 또 함께 하자."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실상은 달랐다. 사람들은 돈을 주면 다음 번엔 더 싼 학생들을 찾아 갔다. 그렇게 불리한 계약서를 쓰거나, 대충 작성하거나, 귀찮으니 생략했던 과거는 모두 미래에 크고 작은 피해로 돌아왔다. 이러한 일회성 계약 형태의 불안정한 수입이 심적으로도 물적으로도 힘들었다. 회사에 정착하게 되면서 깨달았다. 정말 많은 순간 싸워 왔구나. 그러나 '계약'으로 인한 고통은 회사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웨딩 플래너가 계약서를 내밀었을 때 깨달았다. 일단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계약하는 것이 박람회의 취지이자 목적이라고 보였다. 대면한 플래너는 1시간 정도 열정적으로 설명해주고 실제로 미안하고 수고하고 있다는 감정이 들 쯤에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렇게 산전수전 겪었는데도 아직도 이런 권유에 마음이 약해지는 나란 사람이 참 싫었다. 난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나의 지지부진한 벌이나 안일한 사업 수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따끔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벌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돈 관련해서는 노력하고 싶지 않다. 내가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열심히 하든 말든 모두가 깎으려고 노력했다. 마치 깎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물렁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네고를 받아들인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네고할 입장이 오면, 이것 또한 노력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의 노고에 대해 정당한 가치를 치르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선하지 않다. 플래너의 어서 사인하라는 눈빛을 애써 피했다. 지금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다. 아마 내가 알아본 것 보다 더 저렴하고 품질이 괜찮은 옵션이 있을 거라고 애써 외면했다. 언젠가 이런 일에서 자유로워 질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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