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도 법이지만 돈이 그렇게 많이 든다고
어머니는 쉰여섯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예순넷에 세상과 작별하셨다. 의학 기술이 질병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는 오래전 일이라 해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이때 겨우 갓 성인이 된 나이였다. 죽음과 죽음이 주는 관계의 상처에 대해 알지 못했고, 깊이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 시기 나는 늘 훈련은 고되고, 수면은 부족한 데다, 혹독한 내무생활을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다.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당나라의 시성(詩聖) 두보는 그의 시 ‘곡강이수(曲江二首)’중 ‘이수’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했다. 인생 칠십이 예전부터 드물다는 뜻이다. 하지만 요즘 주위를 돌아보고, 부음(訃音)을 살펴보면 질병이든 노환이든 사람 수명은 대개 여든이 넘는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25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83.5세(남성 80.5세, 여성 86.4세)로 OECD평균 보다 2.4년이 길다고 한다.
올해 장인어른 연세는 여든다섯이고, 장모님은 여든셋이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건강을 자신할 수 없고, 실제로도 그다지 건강이 좋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내도 처남도 걱정이 많다.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묻고, 가끔 찾아뵙고 식사도 같이 하지만, 두 분의 신체와 정신을 자식들이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내는 장모님과 장인께서 어제 일도 가끔 기억에서 지우시고, 어디 다치시기라도 하면, 그것이 가벼운 생채기일지라도 많이 속상해한다. 게다가 그 상황이 진화해 죽음에까지 도달하면 눈시울이 금방 붉어지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나 또한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구약을 보면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살고,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구백육십 구세까지 살았다. 동양에서도 팽조(彭祖)가 팔백 세를 살고, 심지어 동방삭은 삼천갑자를 살았다고 한다. 불교는 한발 더 나가 윤회를 통해 영겁을 사는데, 단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기록된 수천 년 인류사에 의하면, 그건 경전과 설화,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자연이 준 인간 수명의 일을 인간이 거스를 수는 없다. 오죽하면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동남·동녀 8백 명을 보내고, 우리네도 때만 되면 구십 구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이삼일 앓다가 죽자! 라며, ‘구구팔팔이삼사! 잔을 높이 들고 건배사를 외치겠는가. 하지만 염라의 명부는 넓고 빈틈이 없어 피할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 내 나이는 오래전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나이의 중간에 있다. 한국인 평균수명으로 본다면 앞으로 20~25년은 까딱없는 나이다. 하지만 인생에 선입선출(先入先出)이 없고, 죽음을 부르는 질병과 사고사가 나만 피해 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그래 까짓것, 좋다. 올 테면 오라! 나 또한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대항할 수 없는 ‘것’이 찾아올 때다. 육체적으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단지 생명유지 장비에 의해 내 ‘숨’이 연명되거나, 정신적으로 내 인생 전부가 부존재 되어버리는 상황이 와서 내 살아온 전부가 ‘망각(忘却)’이 되는 때,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경제적 부담과 부양자들의 고통은 차치하더라도 내 존엄이 무너지는 상황을 ‘숨’이 멈추고, 의사가 “운명하셨습니다.”라고 사망진단을 내릴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선택하기를 원한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로지 존엄하게 죽고 싶다.” 이것이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다가는 마지막 존재이유다. 그런데 이것이 법으로 어렵고, 돈이 그렇게 많이 든다고?
※작가노트
기네스북에도 오르며 공식적으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1875년에 태어나 1997년에 죽은 프랑스 여성 ‘잔 루이즈 칼망’으로 겨우 122세를 살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