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병란은 모두 반정(反正)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남문(南門)은 남한산성의 정문이다. 정조 3년에(1779년) 성곽을 보수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했다. 동·서·남·북 4개의 문중 가장 크다. 남문 서쪽으로는 일장산(청량산) 정상에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고, 조금 더 가다 보면 정축년(1637년)에 임금이 산성을 나간 서문(西門)이 있다. 남문 오른편 검단산 쪽으로 가다 보면 남장대(南將臺) 터를 지나 동문(東門)이 나온다.
병자년(1636년, 인조 14년) 12월 14일 새벽 임금은 이 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임금이 광희문(光熙門,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나와 남문 앞에 도착했을 때 사슴 한 마리가 지나갔다. 호종한 내시가 말했다 “이것은 길조(吉兆)입니다. 전하께서는 머지않아 환궁하실 것이옵니다.” 임금은 이 문으로 들어온 지 47일 만에 서문으로 나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올리고 환궁했다. 내시의 말은 틀리지 않았고, 사슴은 길상(吉祥)이었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은 북방 수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했다. 하지만 임금 광해를 몰아낸 반정(反正)에 이어 이괄의 난까지 겪은 조정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처지가 아니었다. 병자년(1636년, 인조 14년) 12월 1일 압록강변 일대 봉화대에서 횃불이 올랐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 등은 몽고족과 한족, 여진의 병사로 구성된 13만 명(혹은 12만 명)의 청병을 몰아 압록강은 넘었다. 임경업은 도원수 김자점에게 파발을 보내고 의주 남쪽 백마산성에 들어가 농성했다. 청병은 임경업이 농성하는 백마산성을 피해 곧바로 한양으로 내달았다.
12월 13일 청병이 평양에 이르렀다는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14일에는 개경에 다다랐다는 개성유수의 급보가 올라왔다. 조정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임금은 이날 대궐을 버리고 강화로 가고자 했으나, 마부대의 군사가 길을 막았다. 발길을 돌린 임금은 이조판서 최명길이 시간을 버는 사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성에 들어간 지 하루만인 15일 새벽, 임금은 산성 남문을 빠져나가 다시 강화도로 가고자 했다. 강화도는 이미 정묘년(1627년)에 가 본 적이 있었고, 하루 먼저 세자빈과 원손, 대군 등 왕족들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임금은 산성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날 폭설이 내려 말들의 발을 묶었고, 다음날 칸의 군대가 바람처럼 남한산성에 당도했다. 그리고 정축년 정월의 첫날, 칸은 그의 군대를 크게 늘려 탄천에 포진했다. 이후 산성은 고립무원이 되었다. 한동안 암문(暗門)과 빈틈을 찾아 밖으로 나가고, 안으로 들어오려 했으나, 나가다가 죽고 들어오다가 죽는 일이 잦아졌다. 종내에는 바람만이 성 안과 성 밖을 넘나들었다.
병자년 12월 성 안에는 1만 3천 명의 병사가 있었으나 전쟁 같은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양곡 1만 4천3백 석과 장(醬) 220 항아리는 시간을 이기지 못해 배급량을 줄여도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관량사(管糧使)는 얼마나 끼니를 연장해야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걱정했다. 임금은 “걱정은 너의 소관이 아니다.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껴서 근력을 상하게 하지는 말라”」(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37쪽)고 말했다. 영의정 김류는 추위를 막기 위해 군병들에게 나눠준 가마니를 거두어들였다. 성안삼거리에서 남문에 이르는 길 양지에 말먹이로 쓰일 가마니가 늘렸다. 성 밖으로 달아난 백성들의 초가지붕도 헐려 말먹이로 쓰였다. 말들이 다시 먹지 못해 죽으면 그 말들을 군병들이 먹었다. 말들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남문 밖에 칸의 군사들이 포진한 날, 영의정 김류는 남장대에서 서장대에 있는 수어사 이시백을 불러 마병(馬兵)으로 밖을 도모할 수 있는 목인 남문 밖을 청병(淸兵)에게 내 준 죄를 물었다. ‘싸울 수 없던 싸움이었다는 것을 영의정은 모르는가?’ 「삼전도 본진에서 남문 쪽으로 이동한 청의 병사는 기병과 보병 일만 오천이었다. 청병의 동태를 미리 알았다 해도 남문 앞 들판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이시백은 고개를 들어 김류를 노려보았다. 김류는 나장에게 중곤(中棍) 스무 대를 치게 하곤, “당상이니 바지는 벗기지 마라”고 했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100쪽) 오래전 성안에 있는 임금과 뜻을 함께해 전 임금을 몰아낸 김류는 군권(軍權)을 통할하는 체찰사(體察使)를 겸하고 있었다. 안에서의 싸움이 밖의 싸움보다 모질고 힘들었다.
병자년에 남문은 공조판서 구굉(具宏)이 지켰고, 출병과 접전이 자주 있었다. 영·정조 때의 문신 서유방(1741~1798)이 남문루에 오른 정조에게 “이제까지도 성 아래 골짜기 사이에서 혹 철환(鐵丸)·전촉(箭鏃)을 얻는다 합니다.”라고 했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문은 “남한산성 서남쪽 해발 370미터 지점에 있다. 선조 때 남문, 동문 등을 수축(修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두산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남한산성의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정조 3년 성곽을 개축하면서 지화문(至和門)이라 불렀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높이 4.75미터, 폭 3.35미터, 길이 8.6미터이며,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들었다. 홍예문 좌우성벽은 자연석을 수평줄에 맞춰 막돌 쌓기로 축조했다. 1976년 복원된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역시 같은 자료에서 소개하고 있는 남문에 대한 설명이다.
남한산성은 오래된 성(城)이다. 삼국시대를 거쳤고, 고려 때는 몽고의 1, 2차 침입을 견뎌냈다. 청의 군사적 위협이 노골화되는 1624년부터 1626년까지 3년여의 공사를 거쳐 석성(石城)으로 완성됐다. 인조는 병자년(1636년) 이곳에서 47일간 칸의 군사와 대치했다. 1779년(정조 3년) 남문루에 오른 정조는 “이곳을 지나는 여느 사람도 모두 분완(憤惋)하고 강개하는데, 더구나 내 마음이겠는가? 이제 이 누각에 올라 남으로 오는 한길을 굽어보며 병자년을 상상하니 똑똑히 눈에 보이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말하길 “이제 비록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나라 안이 안녕할지라도, 편안할 때에 위태한 때를 잊지 않는 도리로서는 군신상하(君臣上下)가 척연(愓然)히 흥기(興起)하고 감분(感奮)하여 서로 경계하고 힘써야 할 바이다.”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8권에 나온다.
병자년과 정축년 성안에서는 무수한 말들이 쏟아졌다. 최명길은 ‘화(和)’를 조용히 말했고, 김상헌은 ‘전(戰)’을 크게 소리쳐 말했다. 둘의 나이는 열여섯 살 차이가 났고, 김상헌이 많았다. 하지만 13년 전(1623년 3월 12일) 서인을 중심으로 하는 반정(反正)이 일어났을 때, 최명길은 직접 참여했고, 김상헌은 복상(服喪) 중이었으나, 서인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반정을 일으킨 지 10개월 만에 반정공신들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공신으로 북방을 수비하던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 이괄은 1624년 1월 22일 왜병 포로 1백 명과 자신 휘하의 북방 수비군 1만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해 19일 만인 2월 10일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때도 임금은 대궐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했다. 며칠 후 난은 진압되었지만 북방은 비었고, 백성들은 조정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묘년과 병자년 두 번에 걸쳐 우리가 호란이라 부르는 병란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춥고, 끌려갔다. 지금 내가 생각하니 두 번의 병란은 모두 반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때의 성안처럼 지금 무수한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끝없는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고, 숭명배청(崇明排淸)은 이름만 바뀐 채 계속되고 있다. 명분을 내세워 앞날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그 명분은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현실은 명분에 밀려 자리를 잃고 있다. 아! 병자년과 정축년의 겨울 같은 날들이 다시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밖으로 솟구쳐 나오는 울화를 속으로 다지고 눌러 담았다. 다시 남문을 바라보았다.
남문 앞 저 500년 된 느티나무는 그날을 기억할 것이다. 380년 전 그때도 이미 나무는 100년을 살고 있었으니, 나이테마다 그 기억을 담아 촘촘히 새겨두었을 것이다. 어디 저 느티나무뿐이랴. 남문 위로 뜨는 저 달이 그날을 보았을 것이고, 무수한 저 별들이 그날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 땅들이, 저 성벽이 그때, 그날, 남문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서쪽 성벽을 타고 불어와 동쪽으로 지나갔다. 성벽 사이로 그날처럼 바람이 빠져나갔다. 바람은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기억은 쌓이고 다져져 더욱 단단해져야 한다. 남문을 내려오는 내내 조선의 가장 치욕적이었던 시대와 두 임금에 대해 생각했다.
※작가노트
선조(宣祖, 1552~1608)와 인조(仁祖, 1595~1649)의 공통점 : 조선의 임금으로 재위 기간이 40년 7개월(선조 14대, 1567.7~1608.2), 26년 2개월(인조 16대, 1623.3~1649.5)에 달해 조선 임금의 평균 재위기간인 19년보다 훨씬 길었다. 정상적인 왕위서열이 아니었다. 선조는 방계였으나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고, 인조는 스스로 반정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다. 큰 전쟁이 있었다. 선조는 임진년과 정유년에 걸쳐 왜(倭)에 두 번 침략당했고, 인조는 정묘년과 병자년 호(胡)에 두 번 침략당했다. 이 시기 백성은 피폐했고, 사직은 존망에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자 대궐을 버렸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 갔고, 인조는 정묘년에는 강화도로 병자년에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인조는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도 대궐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했다. 선조는 세자인 광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선위를 망설였고, 인조는 소현세자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소현세자는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둘 다 무능했다. 특히, 한 명은 더 용렬했고, 한 명은 더 무능했다. 그러나 다소 치적(治績)도 있으리라. 편 가르기에 능했다. 한 명은 붕당의 시초를 열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으며, 한 명은 척화와 주전으로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고 유지했다. 선조는 임란의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명(明)을 섬겼고(임진왜란이 끝나고 이순신 ‘따위’ 조선의 장수들과 의병 대신 황제국 명에 모든 공을 돌렸을 정도다.), 인조는 정축년(1637년) 정월 첫날 칸의 군대가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있는 중에도 북경의 명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둘 다 두 번의 전화(戰禍)를 불러들여 백성을 피폐하게 한 공으로 ‘조(祖)’를 묘호로 했다. 두 임금이 다 이러했다. 그러나 다소 치적(治績)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