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넘쳐나 화(和)와 전(戰)이 날카롭게 치고받았다
2017년 9월 3일 오전 7시 42분 계획보다는 좀 늦은 시간 집을 나서 남한산성을 올랐다. 잠깐 쉬어가라는 중간 쉼터에서도 쉬지 않았다. 남한산성을 본격적으로 오르는 영춘산 마루턱에서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걸어 남한산성 남문(至和門)에 도착해 성안으로 드니 8시 31분이었다. 올라오는데 49분이 걸렸다. 보통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남문 앞에서 500년 넘은 느티나무를 남문과 빛과 함께 담아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남문은 지난주와는 또 다른 남문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14일 인조는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1637년 1월 30일 서문을 통해 산성 밖으로 나갔다. 성 안에 있었던 47일 동안 임금과 백성은 춥고, 배가 고팠다. 겨울의 추위는 성을 가득 채웠으나 봄의 기운은 아직 멀었고, 신하들의 말은 넘쳐났으나, 그 말의 중심에 임금과 백성은 없었다. 외적이 성 밖에 있었으나 성 안에는 명분만이 있었고, 화(和)와 전(戰)은 날카롭게 치고받았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목을 매달아, 이조참판 정온은 칼로 배를 찔러 죽음으로써 화의를 막으려 했으나 죽지 못했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화의로 백성을 살리고자 했다. 삼사(三司)의 당하(堂下)들은 최명길을 참하라 임금에게 머리를 땅에 찧으며 울었다. 그중 몇 명은 밤을 틈타 성을 빠져나갔다.
정축년(1637년, 인조 15년) 설날 임금은 명(明)이 있는 북경을 향해 망궐례(望闕禮. 궁궐이 멀리 있어서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왕을 배알 하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유교의례. 여기서는 중국 황제의 생일에 왕을 비롯한 문무관원, 종친 등이 명의 궁궐이 있는 북경을 향해 드리는 의례를 말한다. 1897년 대한제국이 창건된 이후 폐지되었다.)를 올렸다. 산성 행궁이 내려다보이는 망월봉에서 청(淸)의 칸은 그것을 지켜보았다. 분노하여 화포를 쏘려는 용골대를 칸은 말렸다. “쏘지 마라. 저들이 예법을 행하고 있지 않느냐. 정초에 화약 냄새는 상서롭지 못하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63쪽) 칸은 살아있는 임금을 대면하고 싶었다. 닷새 만에 한양마저 빼앗긴 저들이 무엇을 믿고 궁벽한 저 속에 웅크리고 있는가. 칸은 조선의 속내를 알 수 없었고, 답답했다. 임금이 북경을 향해 절을 마치고 돌아앉을 때 최명길은 망월봉에서 펄럭이는 황색 일산을 보았다. 김상헌도 보았고, 임금과 신료들도 보았다.
지난해 10월 어느 일요일 그때도 나는 남한산성을 올랐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남문 오른쪽으로 동문을 거쳐 북문과 서문을 돌아 다시 남문으로 오는 길을 밟으려 했다. 그런데 중간에 길을 잃어버렸다. 안개가 짙었고, 길은 이곳저곳에서 나뉘어졌다. 가야 할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을 찾다 망월봉을 지났다. 높지 않은 야산 봉우리에는 ‘망월봉’이라는 돌비석이 서 있었다. 그때 나는 350년 전 이곳에서 황색 일산을 펼치고 칸이 산성 행궁에서 망궐례를 올리고 있는 임금을 내려다보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나는 길을 찾지 못했다. 길이 아닌 길로 산을 내려와 비를 맞으며, 광주의 어느 편의점 앞에서 아내를 불러 집으로 돌아왔다.
망궐례를 지내고 나서도 임금은 춥고, 배가 고팠다. 황색 일산이 두려웠다. 칸이 전장을 떠나기 전 임금은 성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그것을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신료들도 백성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강화도의 원자(元子, 아직 왕세자에 책봉이 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와 빈(嬪, 왕세자의 아내)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바람을 타고 성을 넘어 행궁으로 날아들었다. 임금은 더 이상 견딜힘이 없었다. 임금은 결국 산성을 나왔다. 임금은 송파 나루 앞 삼전도에서 칸에게 세 번 머리를 땅에 찧고, 아홉 번 절하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칸은 구 층 단 위에 있었다. 임금은 아래에서 칸에게 세 번 절했다. 청의 사령이 절의 수를 세었다. 칸이 구 층으로 임금을 불러 세 잔의 술을 주었다. 임금은 잔을 받을 때마다 칸에게 세 번씩 절했다. 이로써 조선은 청과 형제의 나라에서 군신의 나라가 됐다. 정묘호란 9년 만이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지 39년이 되는 해였다.
남문을 나와 온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아무런 생각 없이 거의 뛰다시피 했다. 집에 도착하니 9시 20분, 보통의 경우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길을 1시간 40여분 만에 다녀온 것이었다. 샤워를 하고 TV를 켰다. 뉴스 속보가 나왔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속보였다. 이번이 여섯 번째라고 했다. 폭탄의 종류는 1년 전보다 더 높은 기술이 필요한 수소탄이라고 했다. 그 위력이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최소한 3배가 넘고, 폭탄이 떨어진 곳으로부터 반경 2.5킬로미터 내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사망할 것이라고 했다.
미디어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번쩍거렸다. 그들의 말은 강을 넘어 바다로 나가 차고 넘쳤다. 청와대에서는 NSC(National Security Council,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대책을 말했지만 말에는 힘이 없었다. 군은 좌시하지 않고 응징하겠다는 말과 함께 재래식 무기를 시연했다. 정치권에서는 350년 전 남한산성 안에서 난무했던 말들이 다시 살아나고, 또 죽었다. 이웃 나라 총리와 동맹국 대통령은 수차례 통화를 하며 급하게 말로 움직였다. 난 리모컨을 들어 예능방송과 골프방송으로 채널을 번갈아 돌렸다. 그러다 낮잠을 잠깐 잤고, 자다 깨어 비빔국수를 만들어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마트에 가 저녁거리 장을 보았다. 월요일 졸업식 사진을 찍을 아들은 머리를 깎았다. 마트에서 사 온 열무로 열무김치를 담갔다. 그사이 일요일이 지나갔다.
※작가노트
지난밤 잠을 설쳤다. 자는 듯 마는 듯 자다 잠을 깼다. 시간은 날을 바꾼 새벽 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반 정도 읽다만 김훈의 ‘남한산성’을 펼쳐 들었다. -이 책은 학고재에서 2007년 4월 14일 초판이 발간됐고, 나는 2007년 5월에 발간된 15쇄를 그해 12월에 사서 2008년 1월 1일 완독 했다.- 김훈의 글은 간결했고, 직접적이었으나 마른 낙엽처럼 건조해 머리에서 쉽게 부서졌다.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말의 방향 또한 모호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이어지고 이어져 큰 그림을 그렸고, 가슴에 큰 울림을 전해주었다. 책을 다 읽고 덮으니 새벽 다섯 시가 넘었다. 나는 잠을 청해 잠시 다시 잤다. 맞춰놓은 알람을 듣고 잠을 깨니 6시였다. 오늘은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꼭 19년째가 되는 날이다. 돌이켜보니 그간 살아오면서 우리 부부사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겨울 산성처럼 춥지도 않았고, 그때의 백성처럼 굶지도 않았다. 말이 말을 낳아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싸움도 크게 없었다. 아이들은 공부에는 뜻이 없으나, 마음이 착하고 속이 깊어 나와 아내의 속을 썩이지도 않았다. 가끔 소소하게 다툰 적은 있었으나 아내는 나의 말과 행동을 잘 이해해 주었고, 나 또한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담담하게 지킬 것은 지키고 살아온 19년이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삶이 계속 이어지기를 결혼기념일 새벽 나는 진실로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