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서장대에서 병사들을 호궤했다

삼남의 군사들은 밤을 새워 달려오라!

by 김무균

추석 연휴의 첫날이었고, 토요일이었으며, 9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제저녁 과음을 한 나는 특별한 할 일이 없었다. 아내는 아침을 먹고 작은 아이와 함께 태권도 학원과 농구스쿨을 가면서 집에 돌아오면 저녁 시간을 좀 넘길 것이라 했다. 혼자 남은 나는 무엇을 하고 하루를 보낼 것인가 고민했다. 헬스장을 갈 것인가? 산을 오를 것인가? 잠시 후 나는 추석 연휴 중 해야 할 계획 하나를 오늘 하기로 결심했다.


등산복을 차려입고, 등산화를 신었다. 등산 바지는 오래전 회사 산악동호회에서 준 통이 넓은 카키색 바지다. 길이가 늘어났는지 키가 줄었는지 너무 길어 최근 수선집에서 길이를 2인치 가까이 줄였다. 등산화는 K2 파란색 새 등산화를 신었다. 평소 신던 갈색 등산화는 오래 걸으면 끈을 거는 쇠고리에 복사뼈 부근이 눌려 몹시 아팠고, 오늘 난 좀 오래 걸을 계획이었다. 평소에는 빈 몸으로 산을 올랐지만 오늘은 허리에 작은 허리가방 하나를 맸다. 허리가방은 10년 전 산악자전거를 탈 때 마련한 것이다. 허리가방에 지갑과 휴대폰, 등산용 손수건 한 장, 이어폰과 집 열쇠, 500ml짜리 생수 한 병을 넣었다. 집을 나서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58분, 서문으로 오르려던 생각을 바꿔 늘 오르던 길을 따라 남한산성 남문으로 발길을 향했다. 추석 명절 연휴이어서인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평소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쉬지 않고 걸어 남문에 도착하니 12시 46분이었다.


성 안에서 남문을 바라보며 땀을 닦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물맛은 차고 시원했다. 잠시 돌난간에 앉아 등산화를 벗어 안의 이물질을 털어냈다. 오르는 내내 신경이 쓰였으나 귀찮음으로 불편을 감수했었다. 다시 등산화를 신고 끈을 조였다. 왼쪽으로 오르는 표지판에 수어장대 1.5km, 서문 2.1km라고 쓰여 있다. 나는 평소 오르던 등산로 대신 성벽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성 밖에서 보는 산성의 벽은 높아 안과 밖을 나눴지만 성 안에서 보는 성벽은 얕아 어른 키를 넘지 않았다. 수어장대로 가는 성벽 길은 오르막이었고, 돌길과 나무계단이 가파르게 이어졌다. 병자년과 정축년 겨울 성 안의 병사들은 이 길을 힘겹게 오고 가고, 또 지켰을 것이다. 발바닥으로 스며드는 냉기에 발을 굴렀을 것이고, 눈비를 피하기 위해 목을 넣고 어깨를 웅크렸을 것이다. 그래도 바람은 병사들의 언 몸을 송곳처럼 찌르고 훑고 갔으리라. 수어사(守禦使) 이시백도 체찰사의 부름에 서장대에서 이 길을 걸어 남장대로 갔다. “수어사는 군병들에게 말했다. 발밑에 마른 잎을 깔아라. 졸지 마라. 추우면 움직여라. 잠들면 얼어 죽는다. 똥오줌은 총안에서 멀리 가서 누어라. 콩은 한 알씩 침으로 녹여서 오래 먹어라. 먹을 것을 지니면 덜 춥다. 발을 늘 깨끗이 씻어라. 발이 더러우면 얼기 쉽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97~98쪽) 수어사는 이경(오후 9시~11시) 무렵 남장대에 도착해 체찰사에게 중곤(中棍) 스무 대를 맞았다.


성벽 길을 따라 오르면서 암문(暗門, 남한산성에는 16개의 크고 작은 암문이 있다.) 하나를 보았다. ‘저 암문을 통해 서흔남(徐欣南, 수어청 병사의 사노였던 그는 병자년과 정축년 성안의 말과 성 밖의 말을 이어지게 했고 그 공로로 면천되었다. 후에 정 2품 가의대부에 책봉되고, 종 2품 동지중추부사 당상관이 되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는 서날쇠로 나온다. 산성 안 지수당 앞에 그의 묘비가 있다.)은 임금의 격문을 가슴에 품고 성 밖으로 나간 것인가?’ 난 뼈만 남은 역사의 유골에 살을 붙이고, 혈관을 만들고, 그 혈관 속으로 피를 흘려 돌게 한 김훈의 활인술에 감탄했다. 그동안 나는 수어장대를 몇 번이나 올랐지만 등산로에서 성벽만을 보았고, 그 벽들이 간직한 날 선 역사와 닳아 뭉툭해진 기억들은 보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30분을 걸어 수어장대에 도착했다. 오후 1시 20분이었다.


청량산 정상에 있는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병자년 당시에는 서장대(西將臺)라 불렀다. 인조 2년(1624년)에 축조되었으며, 동·서·남·북 4개의 장대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성안의 군사를 통괄 지휘했고, 다섯 개의 군영이 딸려있었다. 축조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다. 영조 27년(1751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이름도 수어장대로 바꾸었다. 현 건물은 고종 원년(1896년) 유수 박기수가 재건한 것이라 한다.


병자년(1636년) 12월 16일 남문을 들어온 지 이틀 만에 임금은 성첩을 순시하며 서장대에 올라 병사들을 위로했다. 19일 칸의 군사가 남성에 육박했다. 성 안의 군사가 화포로 공격하여 물리쳤다. 임금이 성을 순시하며 위로하고 전사한 장졸들에게 휼전(恤典, 나라에서 장례비용을 대주는 일)을 베풀 것과 그 자손을 녹용(錄用, 사람을 골라서 씀)할 것을 명했다. 24일에는 군사 4백 명을 보내 출전하게 했다. 출발에 앞서 임금이 몸소 나아가 호궤(犒饋,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했다. 모두 인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궁벽한 행궁 안에서 곤궁한 임금의 말과 걱정은 그냥 말이고 걱정일 뿐이었다. 임금은 삼남(三南, 충청·경상·전라)의 군사가 필요했고, 군사가 달려올 격문이 필요했고, 격문을 전달할 명분에 맞는 전장(戰場)이 필요했다. 수어사가 군병들을 지휘하는 서장대는 ‘전(戰)’을 말하는 임금과 신료들에게 적격이었다.


“장대에 오른 임금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서 군병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얼굴들이 얼어서 벌겋고 퍼렇게 부어있었다. 바람이 산을 치달아 올라 성벽을 따라가며 눈이 회오리쳤다. 영의정 김류가 군병들 앞으로 나아가 임금의 교지를 읽었다.... 「조정이 가난하여 너희들 추위를 덮어주지 못하니 나의 부덕이다. 너희들이 이 외로운 산속에서 얇은 옷에 떨고 거친 밥에 주리며, 살이 얼어 터지고 발가락이 빠지는 추위에 알몸을 드러낸 채 성을 지키고 있으니, 나는 온몸이 바늘로 찔리는 듯 아프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196~198쪽) 교지가 또 말했다. “고립된 성은 위태롭기가 머리카락 같고.... 개미새끼 한 마리 구원하는 자가 없으니.... 군부의 위급함이 이 지경에 이르러 신민의 충정에 기대려 함은.... 충과 의로 삼남의 군사들은 밤을 새워 달려오라. 너희 의로운 신민들은 달려오고, 달려오라.”


성안의 임금과 신료들이 그토록 원했으나 격문의 말은 성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나갔으나 돌아오지 못했다. 성안에서는 ‘화(和)’와 ‘전(戰)’에 대한 새로운 말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말들이 성안을 가득 채웠으나, 종내는 아무도 임금과 사직을 구하러 성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또 들어오지 못했다. 들불같이 일어났던 왜란의 충(忠)과 의(義)는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정묘년 칸의 군사들을 되돌리게 했던 미약한 충(忠)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성첩의 군병들은 어서 빨리 문이 열리기를 바랐으나,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영조(英祖) 6년(1730년) 2월 28일 임금이 서장대에 올랐다. 싸움터를 가리키며 임금이 말하기를, “한봉(汗峰)이 어디 있는가?”하니, 수어사 윤순(尹淳)이 “산성 동쪽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한봉’은 칸이 망궐례를 올리는 행궁의 임금을 내려다본 곳이고, 홍이포로 임금과 조정을 위협한 곳이다.- 이에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뢨다. “성하지맹(城下之盟, 적에게 항복하고 체결하는 굴욕적인 강화)은 예부터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뜻있는 선비로서 이 땅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들 팔을 걷어붙이며 상심(傷心)합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어제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배알하고 오늘 이 장대(將臺)에 오르셨으니, 지난날의 일을 뒤좇아 생각해 보신다면 성심(聖心)이 또한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효종(孝宗)께서는 산림의 선비를 초빙하시고 와신상담의 뜻을 가다듬으며 복수(復讐)·설치(雪恥)의 계책을 강구하여, 장차 천하 후세에 큰 뜻을 펼치려 하시다가 절반을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붕조(鵬殂)하셨으니, 이것이 충신과 지사(志士)들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까닭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효종의 뜻과 사업을 뒤좇아 이으려 하신다면 더욱 이 일에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영조실록 25권에 나오는 말이다.


영조는 21년이 지나 영의정 홍치중의 말을 기억했다. 그리고 1751년(영조 27년) 광주 유수가 서장대를 증축할 때 2층 누각의 안쪽 문루에, 병자년과 정축년의 치욕과 효종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무망루(無忘樓)’라 직접 이름 지어 현판했다. 나는 전각의 무망루 현판을 보면서 영조의 ‘무망’이 명(明)의 재조지은에 대한 무망인지 임금이 삼전도에서 칸에게 당한 치욕을 무망함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무망루 현판은 그때처럼 수어장대 문루 내에 있지 않다. 1989년 수어장대 옆에 전각을 건립하면서 전각 내부에 따로 걸어 두었다. 그제야 일반인들도 ‘무망루’ 현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수어장대 뒤로 돌아가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 들림문이 자물쇠로 잠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햇볕은 따갑지 않았고, 바람은 시원했다. 수어장대 아래 마당 앞에서 수어장대를 올려 보았다. 위용 있고, 늠름했다. 역사의 풍파 속에서 거친 상처를 입은 수어장대는 더욱 단단해졌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난 그 사진 속에 병자년과 정축년 산성을 가득 채웠던 임금과 신하들의 ‘말(言)’이 찍히지 않기를 바랐다. 성 밖과의 싸움보다 모진 성안에서의 싸움이 찍히지 않기를 바랐다. 난 그 사진 속에 백성과 병사들이 성안의 시간을 견뎌낸 마음이 담겨지길 바랐다. 다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수어장대를 뒤로하고 정축년 임금이 성을 빠져나간 서문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작가노트

이날 난 남문을 출발해 차례로 서문, 북문, 동문과 옹성들을 거쳐 다시 남문으로 돌아오는 성벽 길 10여 km를 3시간에 걸쳐 걸었다. 걸으면서 암문을 보았고, 포(砲)터를 보았고, 동·남·북장대 터를 보았고, 옹성(甕城)을 보았다. 멀리서 보지 않고 가까이서 보았다. 성안에서도 보았고, 성 밖에서도 보았다. 외성(外城)인 한봉과 벌봉으로 가는 성벽 길은 걷지 않았다. 무릎에서 신호가 왔고, 멀었고, 지쳤고, 배가 고팠다. 남문에서 집으로 내려오면서 노상의 트럭에서 파는 막걸리 한 병과 파전을 플라스틱 테이블에 놓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혼자 마시고 먹었다. 취하지는 않았다. 내일은 10월 1일, 예순아홉 번째 국군의 날이다. 집에 도착하니 5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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