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찰사 김류가 북문에서 패해 정병 300을 잃었다

북문 밖은 고요했으나 참혹했다

by 김무균

울 산은 실제보다 훨씬 가까워 보였다. 짙어 너머를 볼 수 없는 여름 산이 초록의 동굴이라면, 뼈가 드러나 앙상한 겨울 산은 개활지 같아 숨김없이 제 온몸을 드러내야만 했다. 산성을 오르면서 병자년과 정축년 겨울의 산성을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 내내 산성을 오르면서 느꼈던 감정과는 다른 근원적인 차이를 느꼈다. 지난여름 더위 속에서 느꼈던 산성의 겨울이 관념이었다면, 오늘 영하의 기온 속에서 느끼는 산성의 겨울은 실제였다. 병자년과 정축년 산성 안의 추위와 배고픔, 성문을 열어야 살길이 열리는 절박함을 생각하니 온몸의 털이 일어서고 뼈가 떨렸다.


산성 안으로 들어왔다. 성 밖의 바람은 성벽에 막혀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 산성을 오르는 내내 세찬 바람이 불었다, 실제의 기온에 바람이 더해져 옷 안에서는 땀이 났지만 옷 밖의 추위는 영하 2도라는 스마트폰의 숫자보다 훨씬 낮았고, 매서웠다. 남문에서 산성 안을 가로질러 곧바로 북문으로 향했다. 수어장대, 서문을 거쳐 성곽 길을 따라 북문으로 가려면 찬바람을 계속 맞아야 했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성안을 가로지르면 북문까지는 채 1km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지난 9월 30일 추석 연휴 때 성곽 길을 따라 돌며 북문(北門)을 둘러보았다, 이후 다시 북문을 찾으려 했지만 그동안 기회가 되지 않았다.


산성의 북문에 대한 글을 마무리한 것이 지난 11월 10일이었다. 하지만 북문을 다시 한번 보지 않고서는 글을 마무리했다고 할 수 없었다. 북문을 다시 찾은 이유였다. 북문은 여름에 볼 때는 철갑을 입은 군병처럼 위엄 있고 절도 있었으나, 오늘 보니 꾸밈이 없어 거칠고 황량했다. 성문 밖으로 나가 병자년 전투가 벌어진 법화골 쪽을 바라보며 그날의 전투를 생각했다. 찬바람이 성곽 위에서 휘몰아쳐 골짜기로 내달렸다. 북문을 다시 찾은 날짜가 열흘만 더 빨랐어도 이 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가을을 우회한 계절은 금세 겨울로 바뀌어 있었다. 두 주 전만 해도 산성의 계절은 여름과 가을의 경계선상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압록을 건넌 칸의 군사처럼 계절은 급하게 산성을 다그쳐 가을을 몰아내고 있었다.” 11월 3일 서문을 올랐을 때 북문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놓은 문장이었다.


병자년 12월 25일 산성 사영(四營)의 대장 신경진(申景禛), 구굉(具宏), 원두표(元斗杓), 이시백(李時白) 등이 임금을 청대(請對)하고 아뢰었다. “체부(體府, 체찰사가 군무를 보는 곳. 즉, 체찰사 김류를 말함)가 사영에 전령하여 서로 의논해서 적을 섬멸하라 했습니다. 어느 곳을 먼저 해야 할까를 모르겠습니다.”고 하자, 임금이 “형세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한번 싸우도록 하라.”고 했다.(인조실록 33권) 며칠 뒤인 12월 28일 저녁 체찰사 김류(金瑬)는 군병 삼백을 북장대 마당에 모았다. 체찰사 직속의 정예 포수 이백에 성첩에서 골라낸 유군 일백이었다. 김류는 임금이 세찬으로 칸에게 보냈으나 용골대가 받지 않아 관량사 창고에 쌓여 있던 쇠고기와 술을 풀어 군병들에게 먹였다. “마지막 소다. 많이들 먹어라.” 허기진 군병들은 두 손으로 소뼈를 쥐고 뜯었다. 언 몸에 찬 술이 들어가자 두어 잔에 취해버린 자들이 마당에 쓰러졌다. 그날 밤 군병 삼백은 북영에서 노숙했다. 아침에 김류는 남은 내장과 선지를 다시 먹이고 군병 삼백을 북문 밖으로 내보냈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50~251쪽)


이에 앞서 12월 15일 어영부사 원두표가 정병 50여 명을 이끌고 북문을 열고 나아가 적을 기습했다. 조선군은 당황한 청병 6명을 죽였다. 산성으로 들어온 후 첫 번째 승리였다. 청군의 수급은 가져오지 못했다.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닷새간 조선군은 성 밖으로 나가 청군 1백 여 명을 죽이는 등 작은 승리를 수차례 거두었다. 23일에는 어영군이 청병의 수급을 가져와 성안에 높이 매달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2월 19일 오후 청군의 좌익 주력군 2만 4천 명이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성안의 조정은 성 밖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지, 포진한 청군의 진영과 산성 서쪽의 먼 곳에서 불길이 오르는 모습을 보고 상황을 추측했다. 열흘이면 오리라 굳게 믿었던 근왕병은 오지 않았다. 산성 안이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는 사이 병자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병자년 12월 29일(나만갑의 ‘병자록’에는 12월 28일 기록으로 나온다.) 김류의 지휘로 벌어진 북문 앞 전투를 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오라고 전령하였다. 그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학해(池學海), 이원길(李元吉)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大罪)를 청하니 임금이 위유(慰諭, 위로하고 타일렀다.)하였다.” 그러나 그날의 일은 실록처럼 간단하지 않다. 이날 김류는 적의 함정일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는 사영대장과 장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비장 유호(柳瑚)에게 칼을 주어 물러서는 군사들을 참하라 명했다. 억지로 떠밀린 삼백 장졸의 대부분이 한나절 만에 비탈진 산길 위에서 외로운 혼이 됐다.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그날 밤 그믐달이 떠올랐고 북문 밖은 고요했으나 참혹했다. 이날의 상황을 김훈은 그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남영대장이 말하길 “지금 성 밖이 비록 고요하나 음험하옵니다. 적들이 목책 너머 산속에 매복해 있고, 소를 풀어서 우리를 꾀어내는 것인데 어찌 저 좁고 오목한 골짜기로 군사를 내몰 수 있겠습니까. 영을 거두소서.” 김류가 노한 목소리로 고함쳤다. “네가 지금 군령을 시비하는 것이냐. 북을 울려라!” 김류의 비장이 북을 때렸다. 북문으로 내려간 군병들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비장이 다시 북을 때렸다. 군병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김류가 환도를 풀어 비장에게 주었다. “체찰사의 칼이다. 뒤를 쳐서 앞을 내몰라.”」


산성 위쪽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김류는 조선군이 청군의 화포와 철갑보병의 칼에 무너지고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초관(哨官)을 시켜 퇴각 명령을 내렸다. 성안으로 돌아온 자는 손가락 수를 넘지 못했다. 유호가 체찰사에게 말했다. “군사들이 물러날 수 없었던 것은 초관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 사람의 목을 베지 않고서는 군대의 사기를 세울 수 없습니다.” 김류는 패전의 책임을 초관에게 물었다. 초관은 참혹한 성 밖의 전투에서는 살아 돌아왔으나, 앞과 뒤가 모진 성 안에서 참수되었다.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유용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김훈의 '남한산성'에서 초관은 김류가 내린 중곤 80대에 “엉치뼈가 흩어지고 허리가 부러졌다.”고 나온다.) 혼전 중인 조선군을 제때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성장(北城將) 원두표도 처형 직전까지 몰렸으나 좌의정 홍서봉이 “대장이 법을 어기고 부장에게 돌리는 일은 옳지 않소.”라며 원두표를 두둔하여 죽음은 면했다. 전일에 김류는 남문 앞을 청병에게 내 준 죄를 수어사 이시백에게 물어 중곤(中棍) 스무 대를 친 적이 있다. 이날 김류는 동장대에 머물며 혼자서 폭음했다. 김류는 이날 차고 쓴 술을 마시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임금은 김류를 벌하지 않았다.


「정축년 설날 아침에 세자와 종친들이 내행전 마루에서 세배를 올렸다. 곤궁한 임금은 세찬을 내리지 못했다. 세자 일행이 물러나자 당상들이 세배를 올렸다. 절을 마친 당상들은 품계대로 도열해 앉았다. 임금이 “북문 밖에 죽은 군병들은 처자식을 성 안에 두고 있는가?” 물었다. 김류가 대답했다. “처자식들은 성 밖에 있고, 모두 홑몸으로 들어온 자들이옵니다.” “성첩에서 사체가 보이는가.” 다시 임금이 물으니 김류가 다시 대답하길 “눈에 묻혀있을 것이옵니다.”라고 했다. 임금이 또 “사체를 묻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은 적어두었는가.” 하니 예조판서 김상헌이 “전하, 설날이옵니다. 동지 때 사라진 해가 다시 떠오르는 날이옵니다. 죽은 군병들의 일은 신들에게 맡기시고 성심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말했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57~258쪽) 이틀 전 북문을 나가 들어오지 못한 군병들은 정축년 새해를 보지 못했다.


김상헌은 정축년 정월 임금이 출성(出城)으로 항복을 결심하자 목을 매었으나 죽지 못했다. 임금이 서문으로 나가 칸에게 항복하러 갈 때는 칭병(稱病)하며 호종하지 않았고, 임금이 산성을 나간 지 칠일만에 산성을 나가 고향 안동으로 돌아갈 때도 임금이 나간 서문으로 나가지 않고 북문으로 나갔다. 서문은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한 문이었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인조 16년 장령 이여익과 지평 이도장이 자신의 이름을 깨끗이 하려고 분수와 의리의 중함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김상헌을 파직시키고 서용(恕容)하지 말라는 계를 올렸다. 임금은 “그대로 두는 것이 옳으니, 굳이 벌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여러 차례 다시 아뢰자 파직시키라 명하였다. 인조실록 37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나는 생각했다. 김류가 지휘한 북문 앞 법화골 전투는 무모하게 출전해 패전한 원균(元均)의 칠천량해전(1597년 7월 5일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과 같았다. 둘 다 호기와 위엄으로 공을 세우려 했지만 능력이 그것을 받쳐주지 못했다. 그 결과가 산성에서는 300여 명 조선군의 전사로 나타났고, 칠천량에서는 160여 척에 달하는 조선 전선의 침몰과 400여 수군의 수장으로 나타났다. 김류는 병자년과 정축년에 영의정이었고, 산성에서는 체찰사였다. 인조실록은 “기국(器局, 재능과 도량)이 고매하고 위풍이 호쾌하며 병가에 통달하여 중망(重望, 명성이 두텁고 인망이 있음)이 있었다.”고 그를 기록했으나, 산성의 북문에서 그는 실록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류는 임금이 전 임금 광해를 몰아낼 때 주도했고, 이 공으로 일등공신에 올랐다. 병자년과 정축년 산성에서는 ‘전(戰)’과 ‘화(和)’에 일관되지 못했고, 임금의 심기를 살펴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나, 필요에 따라 임금의 뜻에 반하기도 했다. 정축년 1월 26일 성첩에서 내려온 군병들이 임금과 조정에 성문을 열라며 행궁에서 시위할 때는 체찰사임에도 말리지 않았다.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자 섬과 왕실과 조정대신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김경징이 그의 아들이다. 김경징은 나중에 삼사(三司, 조선시대 언론은 담당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일컫는다.)의 탄핵으로 사사(賜死) 되었으나, 임금은 지속적으로 그를 용서하려 했다. 반정공신 김류의 권세와 영향력이 이러했다.


북문은 남문에 비해 크기가 다소 작으나 더 견고하고, 더 강인해 보인다. 마치 철갑을 입은 군병처럼 위엄 있고 절도가 있다. 처음 보아도 낯설지 않고 믿음과 호감이 간다. 아마, 병자년의 모든 참담한 기억과 이를 견뎌낸 시간이 북문을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병자호란 후 조정은 군사적으로 산성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으나, 청(淸)은 조선이 성(城)을 중수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그래서 한동안 성을 고치지 못했다. 그러나 청의 간섭이 약해진 숙종 이후 동쪽 봉우리에 봉암성과 한봉성을 쌓고, 남쪽으로 신남성을 신축했다. 영조 29년인 1753년에는 신남성에 동돈대와 서돈대를 개축했다. 그리고 정조 3년 1779년에는 남한산성의 성곽을 개축했다. 북문도 이때 새롭게 증축되었다. 성문은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든 홍예문으로 높이 3.65m, 폭 3.25m이다. 성벽의 두께는 7.1m에 달한다. 단층의 문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며,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을 올렸고,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1779년 정조는 이곳에 들러 북문 앞 전투의 패배를 상기하며, 다시는 이런 참혹한 패배는 없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날 이후 산성의 북문은 전승문(全勝門)이 되었다.


※참고자료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권(한명기 著), 소설 남한산성(김훈 著), 병자년 남한산성 항전일기(나만갑 著), 조선왕조실록, 두산백과사전, 네이버 자료 등


※작가노트

내가 산성을 올라 북문을 다시 찾은 날짜는 2017년 11월 18일 토요일이었다. 이날 산과 산성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고, 기온은 영하 2도였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여서 더욱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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