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유지는 준비되었으나 전할 밀사가 준비되지 못했다
서흔남(徐欣男)은 수어청(守禦廳) 병사의 사노(私奴)였다. 이 한 줄을 써놓고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글의 가닥을 잡아야 할지 어떤 자료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야 할지 요령부득이었다. 금세 한 주가 지나갔고 열흘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서흔남의 묘비를 찾은 날의 감상도 무디어갔다. 마음은 급했지만 자료가 준비되지 않았고, 준비되지 않은 글을 쓸 수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고, 김훈의 ‘남한산성’을 다시 읽으며 서날쇠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왕조의 실록은 몇 줄이 되지 않았고, 소설 속의 서날쇠는 실제와 상상이 버무려져 있었다. 인터넷의 자료는 짧았고, 가늘고 희미했으며 비슷하거나 사실적 근거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승정원일기에서 두어 줄 행적을 찾을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과 관련된 다른 책자와 자료들에서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과문(寡聞)한 탓에 더 이상 자료를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병자년 산성에서 관량사를 지냈던 나만갑의 ‘병자록’을 구해 혹시 그의 흔적이 있을까 찾아보았다. 책에는 짧게 그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이미 다른 분들께서 재빨리 사용한 내용들이었고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정축년 산성의 서문(西門)에서 벌어진 일들을 쓰고 난 뒤 대학 동창인 J로부터 “지면이 남는다면 ‘남한산성’ 영화에 나오는 서날쇠(실존 인물 서흔남)의 이야기와 서흔남 묘비에 관한 것도 쓰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라는 문자를 받았다. 서흔남은 지난번 수어장대(西將臺) 이야기를 쓸 때 두어줄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J에게 “원래는 북문(北門)의 일을 쓰고 나서 동문(東門)의 일을 쓰려고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요청으로 순서를 바꿔 북문 이야기 다음에 서흔남의 기록을 먼저 쓰겠다.”고 약속했다. 컴퓨터에서 지면이야 차고 넘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의 이 사달을 일으키게 될 줄은 몰랐다.
11월 18일 약속을 참회하며 서흔남의 묘비가 있다는 지수당(地水堂)을 찾았다. 그날은 바람이 매우 찼다. 성 밖의 바람이 성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는 못했으나, 성벽을 타고 넘어와 영하의 기온과 합쳐져 날씨가 더욱 매서웠다. 묘비(墓碑)는 그의 가늘고 희미한 기록처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수당 부근을 한참이나 헤맨 끝에 그의 묘비를 찾을 수 있었는데, 지수당과 마주하고 있는 관어정(觀魚亭) 둑 한 편에 초라하게 숨어 있었다. 앞에는 조립식으로 지어진 안내소 임시건물이 묘비를 가리고 있었고, 더 넓은 터에는 남한산성 종합상황실과 주차장이 있었다. 묘비는 두 개였다. 하나는 작았는데 가로로 깨어진 것을 얹어서 붙였고, 하나는 더 크고 온전했다. 깨어진 비는 일부가 망실되어 글자도 함께 사라져 있었다. “한씨부좌 ... 대부동지중추부○ 서공흔남지묘 韓氏祔左 ... 大夫 同知中樞府○ 徐公欣男之墓”라 쓰여 있었고, 온전한 비에는 “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서공지묘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라 음각되어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수훈을 세운 서흔남(徐欣男?~1667?)의 묘비이다. 서흔남은 수어청 병사의 사노로서 무당, 와장(瓦匠)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1637년(인조 15년)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외부와 연락이 단절되자 서흔남이 연락업무를 자원하였다. 그는 병자, 불구자, 거지 등으로 변장하고 때로는 청군 병사를 살해하면서 청군 진영을 세 번이나 왕복했다. 이러한 공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고, 당상관이 되었다. 1651년(효종 2년)에는 남한산성 성벽과 4대문 문루, 동북창사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해 목재조달업무를 관장했다. 후에 정 2품 가의대부로 책봉되고, 종 2품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비중 하나는 1667년(현종 8년) 3월 13일에 건립했다. 또 하나의 비는 손상이 심해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 ‘한씨를 왼쪽에 묻었다.(韓氏祔左)’라는 문구로 보아 부인이 사망한 후에 다시 세운 것 같다. 이 비들은 중부면 검복리 병풍산에 있던 것을 광주시청과 광주문화원에서 발견하여 1998년에 이 위치에 안치하였다.” 묘비를 설명하는 표지판의 글은 사실과 추측이 함께 쓰여 있어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추측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려진 벼슬은 이름뿐인 허직(虛職)이었고, 죽음(歿)은 있으되 태어남(生)이 없는 기록이었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과 병자년 산성 안에서 그의 처지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관어정과 지수당 연못의 물이 바람에 일렁였다. 그 위로 바람에 날린 낙엽이 떨어져 이리저리 떠돌았다.
“칸이 청천강을 건넜다는 소문이 성안에 돌았다. 소문은 낮게 깔려서 들끓었다. 칸이 오면 성이 열린다는 말과 칸이 오면 성이 끝난다는 말이 뒤섞였다. 칸이 오면 성은 밟혀 죽고 칸이 오지 않으면 성은 말라죽는다는 말이 부딪혔다. 열려서 끝나나 깨져서 끝나나, 말라서 열리나 깨져서 열리나 다르지 않아서 칸이 오거나 안 오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돌았다. 세자가 성을 나가야 산다는 말도 들렸고, 그러면 종내는 임금도 나가야 될 것이라는 말도 들렸다.”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180~183쪽)
묘당에서는 들끓는 소문에 ‘화(和)’와 ‘전(戰)’이 다시 부딪혔다. 젊은 간관들은 “명길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적진에 보내고 그 간을 으깨고 염통을 부수어 성첩에 바르라.”고 임금 앞에서 머리를 찧었다. 일전 임금은 행궁 내행전(內行殿)에서 최명길을 불러 마주하고 성 안과 성 밖을 통하는 길을 물은 적이 있었다. 다음날 새벽 최명길은 성 안이 모르게 서문 옆 암문으로 성을 나가 삼전도의 용골대에게 임금이 성 밖으로 나갈 길을 물었다. “귀국의 세자와 대신들을 우리 군영으로 보내라. 그리고 칸의 조칙을 받아라.” 최명길은 용골대의 목소리를 성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행궁의 임금에게 전했다. 임금은 “언관들의 말이 심히 가파르나 대의를 밝혀 아름답다.”고 했다. 성 안의 임금은 성첩과 행궁과 성안에 가득한 말(言)먼지를 가라앉히고 성문을 열어 살고자 했다. 그러나 그 뜻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묘당에서는 ‘전(戰)’의 목소리가 컸고, ‘화(和)’의 목소리는 드물고 낮았다. ‘전(戰)’은 임금의 말을 성 밖으로 전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군병을 모아 칸과 싸우고자 했다. 임금도 그 말을 쫓아 ‘화(和)’를 감추고 성 안의 말과 성 밖의 말들이 이어지고 그 이어진 말들이 근왕(勤王)의 군병이 되어 임금을 구하러 오기를 바란다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거가(車駕)가 바야흐로 성안에 있는데 안으로는 믿을만한 형세가 없고 밖에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는데 화사(和事, 주화의 일)는 이미 끝장났다. 경들은 속히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구원하라. 충과 의로 삼남의 군사들은 밤을 새워 달려오라.” 성 밖으로 나가 삼남으로 전해질 임금의 말이 문장 좋은 승지에 의해 다듬어졌다.
며칠이 지나도록 임금은 격서의 뒷일을 묻지 않았다. 임금은 신료들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신료들은 아뢰지 않았다. 삼남의 관군과 창의를 시급히 불러들여야 한다고 울음으로 아뢰던 당상들도 격서의 뒷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임금의 격서는 눈비에 젖지 않게 초로 밀봉되어 승정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닷새가 지나 임금이 먼저 물었다. “유지는 성 밖으로 나갔는가?” 병조판서 이성구가 아룄다. “아직 ....” “유지가 나가지 못했다면 격서가 아니라 종이란 말인가.” “다녀올 사람을 찾고 있사온데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322쪽)
임금의 유지는 준비되었으나 그것을 전할 밀사가 준비되지 못했다. 임금의 말을 전할 밀사를 천거하는 일은 수어사와 사영(四營,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의 대장들과 묘당이 맡았다. 성안의 사대부들은 성안의 길조차 더듬거려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성안에는 원래 성에 있던 병사들과 도성에서 임금을 따라온 금군과 경기도 지방 수령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온 병사들이 있었으나, 서울의 병사들은 지방의 길을 몰랐고 지방의 병사들은 서울의 지리를 몰랐다. 병사들은 추위와 주림에 기진해 이미 몸이 버티지 못했고, 칸의 군사들을 뚫고 갈 담력 있는 자 또한 드물었다. 간혹 지방 군장들의 초관이 들어와 성 밖의 말을 성안에 전했으나 다치고 얼어서 다시 나가지 못했다. 「임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격서가 문장이 좋더구나.” 이성구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 들어온 자는 상해서 다시 보낼 수 없고, 내보낸 자들 중에는 돌아오지 않는 자가 허다하니, 품계 없는 천한 군병에게 어찌 유지를 맡기오리까.” “품계 높은 사대부는 길을 몰라 갈 수 없고, 품계 없는 군병은 못 믿어서 못 보내면 까마귀편에 보내려느냐.” “전하 신들을 죽여주소서.” “경들을 죽이면 혼백이 날아가서 격서를 전하겠느냐.”」(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325쪽)
병자년과 정축년 칸의 군대는 산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성안을 고사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때때로 홍이포를 쏘아 돈대와 성첩을 파괴했는데 성안의 공포심이 극에 이르렀다. 군량 또한 나날이 줄어들어 보충할 길이 없고, 길이 막혀 구원병 또한 올 수가 없었다. 오다가도 청군에게 막히고 복병에 의해 죽었다. 1631년 칸이 명(明)의 대릉하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던 전술이 추위와 주림으로 떨고 있는 산성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밤중에 예조판서 김상헌이 서날쇠의 대장간을 찾았다. “조정의 막중대사를 대장장이에게 맡기시렵니까?”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성이 위태로우니 충절에 귀천이 있겠느냐?” “먹고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소이다.” “말해라. 다녀오겠느냐?” “나라에서 하라시니 천한 백성이 어쩌겠습니까.”」(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26~229쪽. 다른 기록들에는 소설 ‘남한산성’과 달리 서흔남이 전령을 자원한 것으로 나온다. 또 승정원일기에서는 김류, 홍서봉 등이 적진을 정탐할 사람으로 서흔남을 추천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침에 김상헌은 서날쇠를 묘당에 천거했다. 말 많은 자들의 말로 행궁이 들끓었다. 천골(賤骨)로서 이미 제 처자식을 성 밖에 보냈으니 믿을 수 없고, 천한 대장장이에게 임금의 문서를 맡길 수 없으며, 천한 대장장이가 가지고 온 문서를 먼 지방의 군장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행궁을 가득 채웠다. 성안 길도 몰라 성 밖을 나갈 수 없는 사대부의 입은 기름처럼 매끄러웠고, 청산의 유수같이 그치지 않았다. 또 나가기 전에 품계를 주어 보내야 한다는 말과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 모르니 돌아온 후에 품계를 주어야 한다는 말도 일었다. 돌아왔더라도 격서를 전했는지 들판에 빈둥거리다 왔는지 모르니 구원병이 당도할 때까지 가두어 두어야 한다는 앞과 뒤가 거꾸로 선 말도 있었다. 말 많은 자들의 말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임금이 말했다. “예판의 뜻을 따르겠다, 이 일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서날쇠는 새벽에 가볍게 행장하고 동쪽 성벽의 배수구를 통해 성을 나갔다. 나가기 전 예조판서와 눈 위에서 서로 크게 맞절했다. 성첩에서 김상헌은 흐린 길의 저쪽으로 멀어져 가는 서날쇠를 보았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그날 서날쇠가 암문으로 나갔는지 배수구로 나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9월 30일 성벽 길을 따라 돌 때 보니 동문 옆 성벽 아래로 넓고 깊은 수문이 있었다. 12월 4일 다시 동문을 찾았을 때는 밖에서 수문을 보았는데 작고 좁아 저것이 수문인지 잘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