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의 군대가 길을 막았으나 의지 또한 부족했다
“삼남의 신민은 달려오고 달려오라!” 임금의 격서에 강원과 삼남(三南)과 서북의 도처에서 근왕병들이 일어났으나, 아무도 임금이 있는 산성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임금과 행궁의 조정은 궁벽한 산성 안에서 추위에 떨고 주림과 싸우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 한 가닥 희망은 임금을 구하러 올 근왕병이었다. 삼남의 군병과 창의(倡義)를 모으고, 그 세력이 산성으로 들면 저 그물 같은 칸의 포위도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금과 조정이 목을 빼고 기다린 근왕병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병자년이 다가도 오지 않았고 정축년이 와도 성안으로 들어오는 근왕병은 없었다. 이제 말라서 죽기 전에 임금과 조정은 스스로 성문을 열어야 할 판이었다.
서흔남이 삼남과 강원도의 군장들에게 임금의 말을 전하기 이전에도 이미 도처에서 근왕병들이 일어나 산성으로 향했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는 근왕의 명령을 받고 도내 각 고을 수령들에게 격문을 띄워 7천여 명의 병력을 모아 공주에 집결시키고, 12월 25일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에게 산성으로 진군하라 명했다. 정축년 초이틀 이의배의 근왕병은 산성 남쪽의 험천(險川, 지금의 동막천으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다.)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판교, 서현 등지에 진을 치고 있던 청군의 공격을 받았다. 오랫동안 안성의 죽산에서 머뭇거렸던 선봉장 이의배는 싸움이 벌어지자 곧바로 도망쳤고, 병사들은 분전했으나 탄환과 화살이 떨어져 버티지 못했다. 정세규는 병력의 절반을 잃고 공주로 후퇴했다.(이날 험천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수천 명의 충청도 근왕병 시체가 험천에 쌓이고 그 피가 수십 리까지 이어져 말이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였다.”는 기록이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 인조 때 문신 김세렴이 지은 일본 사행기-’에 전한다.) 장졸들의 시신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정축년 4월에야 수습되었다.
강원감사 조정호(趙廷虎) 휘하의 원주영장(原州營將) 권정길(權井吉)은 병력 1천을 이끌고 산성 부근의 검단산까지 진출했다. 12월 27일 권정길 부대는 검단산을 내려와 포위망을 뚫고 성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 2천여 명이 이를 막았다. 처음 전투는 청군의 사상자가 많았고 근왕병들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화약이 떨어지고, 청군의 수가 늘어나 기세가 오르자 불리해졌다. 전사자들이 늘어나면서 근왕병의 패색이 짙어졌다. 권정길은 스스로 목을 찌르려 했으나, 부하들이 말려 미수에 그쳤다. 양근(楊根, 현재의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조정호의 본대는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칸의 군대가 길을 막고 있었으나 의지 또한 없었다. 권정길 부대가 패하자 강원도 근왕병 전체의 사기가 떨어졌다.
청군이 한양으로 바람처럼 내달으며 그냥 지나쳤던(당시 조선군은 요충지에 설치된 진鎭을 폐하고 산성을 중심으로 군을 배치했다. 산성은 큰길에서 가까이 있는 성도 30~40리는 되었고, 먼 곳은 하루 이틀 길이었다. 한양으로 치닫는 청군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조선의 군사가 있을 수 없었다.) 서북지방에서도 근왕병들이 일어났으나, 청군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황주 정방산성의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칸의 대군 앞에서 토산으로 이동하다 청군의 기습으로 수천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김자점은 척후를 두지 않고 안이하게 행군했다. 선봉장 이완(李浣)이 소소한 전과를 올렸지만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김자점은 남은 병력을 수습해 미원(경기도 양평)으로 이동했다. 미원에는 김자점 부대 말고도 조정호 부대, 북한산 전투에서 패한 뒤 이동해 온 유도대장(留都大將, 임금이 도성을 떠나 지방에 있는 동안 서울을 지키는 임무를 띤 대장) 심기원(沈器遠, 나만갑은 ‘병자록’에 이때 심기원이 김자점을 대신해 새로 도원수가 됐다고 기록했다.)의 부대 등이 모여 있었다. 모두 합치면 1만 7천 명에 달했다. 산성의 임금과 조정은 이들이 산성으로 들어와 주기를 목을 빼고 기다렸으나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산성으로 가는 여주와 이천의 길을 막고 있었고, 어쩌면 그 길을 뚫어 보려는 의지가 없었다. 김자점, 심기원, 조정호 등 조선의 최고 지휘관들은 미원(迷原), 헤매는 들판에 머물면서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상황을 관망하다 임금이 출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산성으로 진군했다. 이 일로 심기원은 나주로 귀양 갔으나 오래지 않아 방면되었고, 김자점은 진도로 유배됐다. 후에 두 사람은 모두 병조판서에 올랐다.
임금의 격서를 받은 충청, 경상, 전라의 하삼도에서도 근왕병들이 일어났다. 경상감사 심연(沈演)은 도내의 병사 8천을 모아 12월 24일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을 선봉장으로 삼고 2천의 병력으로 문경새재를 넘어 산성으로 진격하라고 명을 내렸다. 자신도 12월 30일 후속 부대를 이끌고 충주에 도착했다. 선봉군은 진군을 재촉하는 명에 떠밀려 식량과 의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도망자가 속출했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에서 쌍령(雙嶺,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에 도착했다. 해가 바뀐 정축년 초사흘 아이신기오로 요토가 지휘하는 청군은 쌍령 왼쪽에 주둔하고 있는 허완의 진영을 공격했다. 처음 공격은 조총으로 잘 막아냈으나 이내 탄환이 떨어졌다. 화살만으로는 청군의 철기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허완은 자결하고, 군사들은 대부분 몰살당했다. 오른쪽에 주둔하고 있던 경상우병사 민영의 진영도 곧이은 청군의 공격에 전멸했다. -나만갑은 병자록에 “허완과 민영 두 병사(兵使)의 군사가 합쳐 4만 명이었다. 허완의 진영은 스스로 무너졌고, 민영은 처음 적을 잘 막아냈으나 실수로 화약에 불이 붙어 진중이 어지러워 패했다. 둘 다 진중에서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날의 전투에 대해 또 다른 기록에는 “총병력 조선군 4만 명, 청군 3,000~6,000명이 싸웠다. 조선군은 부대가 전멸하고 지휘관 전원이 전사했다. 청군의 피해는 미미했다.”고 전한다. 민영의 진영은 300명의 청나라 팔기군에 의해 무너졌다는 기록도 있다.- 경상감사 심연은 여주까지 왔다가 쌍령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 전의를 잃어 조령을 넘어 철수했다. 전라도 의병대장 참의 정홍명(鄭弘溟)도 공주에 이르렀으나 적이 근왕병을 격파하고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해산하고 돌아갔다. 쌍령전투의 패전으로 임금은 한 발 더 삼전도에 가 있었다.
전라감사 이시방 휘하의 선봉장으로 종군한 김준룡(金俊龍)이 정축년(1637년) 초나흘 병력 2천을 이끌고 산성에서 30리 떨어진 수원 광교산으로 이동했다. 1월 초닷새 청장(淸將) 양고리(楊古利, 수무루 양굴리)가 5천의 병력으로 공격했다. 근왕병이 집중사격으로 격퇴했다. 이튿날 청병은 화포를 동원하여 다시 맹렬히 공격했다. 김준룡의 근왕군은 수세에 몰렸으나 유격군이 청군을 향해 돌진하며 전투가 어지러워졌다. 혼전 중에 적장 양고리가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청군 진영이 급격히 동요했다. 당시 조선군이 사살한 최고위급이었다. 양고리는 칸의 매부였다. 광교산의 승전 소식에 성안의 임금과 조정은 환호했다. 그러나 김준룡의 부대는 군량과 화약이 떨어져 더 이상 광교산에서 버틸 수 없었다.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김준룡은 병력을 이끌고 수원 남쪽으로 철수했다. 산성은 다시 기다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광교산을 철수한 김준룡은 나중 파직당했다.
평안도의 근왕병도 뒤늦게 산성으로 진군했다.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와 평안병사 유림(柳琳)은 근왕병을 이끌고 남하해 정축년 1월 26일 김화(金化, 철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진을 치는데 있어 둘의 의견이 달라 서로 화합하지 못했다. 1월 28일 홍명구의 진영과 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의 초반에는 적장을 사살하는 등 청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계속되는 청군의 공격에 전세가 기울어졌다. 전세가 기울자 군관 이원룡(李元龍)이 “평지에서는 적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높은 곳으로 진을 물리자.”고 권했으나, 홍명구가 “장수가 일보 물러나면 병졸들은 백보를 물러난다.”며 듣지 않았다. 수적 열세에다 백병전이 벌어지면서 조선군은 참패했다. 홍명구도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청군은 곧이어 유림의 진영도 공격했으나 숲이 우거진 곳에 들어선 유림의 진영에서 청군의 철기들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낮은 곳에서 위를 향하는 공격은 쉽지 않았다. 유림은 화살과 탄환을 아끼며 청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종내는 화살과 탄환이 떨어져 전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유림은 병력을 수습해 남한산성으로 이동했다. 산성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2월 3일 가평에 도착했으나 임금이 이미 삼전도에서 칸에게 항복한 뒤였다. 홍명구는 문신이었고, 유림은 무관이었다. 훗날 김화전투의 실상을 들었던 박태순(朴泰淳, 1653~1704, 조선 후기 문신, 형조판서·전라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 동계집 6권이 전한다.)에 따르면 당시 조선군 전사자는 1백여 명에 불과한 반면 청군의 사상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적들 속에서도 이 소문이 돌았다.
나는 생각했다. 근왕병은 임금의 격서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으나, 전(前)이든 후(後)이든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성안의 임금과 조정은 성 밖을 자세히 몰랐고, 성 밖의 장수들은 성안의 상황을 세세히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성안의 조정과 성 밖의 장수들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청군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알지 못했고, 갑자기 모집된 병사들은 싸움과 싸우는 방법을 몰랐고, 싸움에 임하는 자세도 되어 있지 않았다. 준비가 안 된 군대에서는 식량과 탄환과 화약이 또 늘 부족했다. 문관들은 말이 바르고 명분에 밝았으나 군사에 대해 알지 못했고, 무관들은 말이 적고 병법에 밝았으나 전략과 전술을 뜻대로 펼칠 수 없었다.(김화에서 진을 칠 때 문신 홍명구는 무관으로 뼈가 굵은 유림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정으로 임금과 조정에서 밀려난 선비들은 창의(倡義)에 적극적인 뜻을 보태지 않았고, 근왕의 기치로 모인 병사들 또한 왜란(倭亂)과 정묘년의 난 때 보였던 충(忠)과 의(義)를 보이지 않았다. 안과 밖이 통하고자 했으나 결국은 서로 통하지 못했고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병자년과 정축년 근왕병의 전투가 대개 이러했다.
나는 또 생각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산성의 근왕이 성공하고, 어느 정도 식량만 비축되어 있었다면 임금이 서문을 나가 칸에게 항복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특히, 식량 문제만이라도 해결되었다면 치욕적인 항복은 없지 않았을까. 일찍이 수어사 이서(李曙,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량을 많이 확보했다. 무신으로 최초로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병자년 산성에서 과로로 순직했다.)는 산성에 군량을 많이 쌓아두었었다. 그가 병들어 교체되자 광주목사 한명욱(韓明勖)이 모은 식량을 산성으로 옮기는 것이 민폐라며 한강변에 갑사창(甲士倉)을 짓고 식량을 모두 그 창고에 두었다. 그런데 칸의 부대가 산성을 에워쌌을 때 오히려 그것이 적병의 좋은 식량이 되고 말았다. 그때 산성 안은 굶주림과 싸우고 있었다. 정묘년(1627년) 조선에 들어온 칸의 군대는 마음이 급했다. 칸은 요동이 불안했고, 조선에서의 싸움이 길어질수록 명과의 전쟁도 힘들어질 것이었다. 강화도의 임금과 묘당을 겁박하며 형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목의 가시처럼 요동이 걸렸다. 그래서 임금이 속을 감추고 겉으로만 형제의 예를 갖춘 것을 알았지만 바람처럼 요동으로 돌아갔다. 병자년에도 칸의 군대는 중원에서 명(明)과 싸우고 있었다. 명은 늙었다고 쉽게 죽지 않았다. 전투는 전체적으로는 칸의 군대가 이기고 있었으나, 또 자주 패하기도 했다. 조선에서 칸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국력 또한 그때까지는 명이 더 우세했다. 임금의 근왕병이 산성으로 몰려오고, 곳곳의 창의군 또한 유격으로 칸의 군대를 괴롭힌다면 중원의 길은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앞을 다하면 뒤가 불안했고, 뒤를 치중하면 앞을 다할 수가 없었다. 칸에게 조선은 늘 불편한 종기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임금의 군대는 임진년의 왜란과 정묘년의 호란을 겪고도 나라 밖 정세에 어두웠다. 명분으로 실리를 막았고, 전쟁에는 안이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칸과 그의 군대를 몰랐다. 칸의 전략과 전술은 늘 일관되어 방책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가볍게 여겼다. 칸의 군대는 만주에서 요동에서 중원에서 매일매일 강해진 군대였다. 임금의 반정이 있기 전 광해군은 늘 요동과 심양의 일들을 걱정하며 신료들에게 의논해 처리하라 당부했지만 척화의 목소리가 높아 실행되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적들과 국경이 서로 접하고 있어 오랑캐의 기병이 치달아 오면 며칠 내로 당도할 수 있습니다. 신들이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근심하지만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요동과 심양 사이에 주병(主兵)과 객병(客兵)이 28만 명이나 되는데도 오히려 근심한다고 하니 하물며 우리나라의 병력으로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지혜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 않더라도 이미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대의가 있고 대세가 있으니, 이른바 대의는 강상(綱常)에 관계된 일을 말하고, 대세는 강약의 형세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 적은 의리로는 부모의 원수이며, 형세로는 표범이나 호랑이처럼 포악한 존재입니다. 표범과 호랑이가 아무리 포악하다 하나 어찌 차마 부모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조정에 가득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차라리 나라가 무너질지언정 대의를 저버리지 못하겠다는 이유입니다.”
비변사가 1621년(광해군 13년) 2월에 올린 보고다. 광해군 시기에도 이러했으니 하물며 인조의 세월에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앞을 보지 못했으니 준비를 할 수 없었고, 앞을 보았음에도 또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치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형세와 처지를 알지 못하고 의리와 명분이라는 족쇄로 스스로를 얽어매 항복의 치욕을 부른 병자년, 결국 근왕의 군사들은 산성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백성들은 끌려가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이후에도 창경궁의 임금과 조정은 또다시 말(言)먼지 속에 들어가 안에서의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