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의 처소가 어디냐? 오늘 몇 방을 보내야겠다”
산성의 동쪽에 있는 한봉과 벌봉, 망월봉은 병자년에 칸의 군대가 포진을 했고, 정축년에는 산성의 성첩과 행궁을 향해 홍이포를 쏘아대던 곳이다. 병자년에 산성의 체부(體府, 체찰사가 군무를 보던 곳)는 이곳을 내버려 두었다. “봉우리들은 야트막한 흙무더기에 불과했으나 성벽에서 가까웠고 시야가 열려 있었다. 꼭대기에서 보면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 성안이 훤히 내려다 보였고, 서장대 아래쪽에 들어선 조선의 행궁이며 삼거리 쪽 관아가 장거리 화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용골대가 삼전도에 도착한 직후 남한산성 외곽을 정찰하며 눈여겨보아 둔 봉우리였다.... 이 작고 보배로운 고지들을 내버리듯 넘겨주는 조선군을 용골대는 이해할 수 없었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5쪽) 정축년 원단, 행궁에서 북경의 명(明)나라를 향해 망궐례를 올리는 임금을 보고 용골대는 화포를 쏘려했다. 칸이 말렸다. “쏘지 마라. 저들이 예법을 행하고 있지 않느냐. 폐하께서도 신들의 예를 받고 계시옵니다. 쏘지 마라. 정초에 화약 냄새는 상서롭지 못하다. 신은 차마 볼 수가 없나이다. 냅둬라. 저들을 살려서 대면하려 한다. 발포를 금한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63쪽) 칸과 용골대가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조선의 산성은 칸이 쥐고 있는 그물 속의 물고기였다. 하지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임금은 내행전 마당에서 계속해서 춤을 추었고, 북경을 향해 절했다. 종친과 신료들도 따라 절했다. 행궁 마당이 조용해질 때까지 칸은 성 안을 내려다보았다.
정축년의 정월이 다 가고 있었다. 칸의 군대와 성 안 조정 사이에 항복을 논하는 국서가 다시 오고 갔다. 칸은 임금의 출성을 몰아세웠으나, 성 안의 조정은 임금의 출성을 한사코 문서에 넣지 않았다. “칸은 조선 왕이 보낸 문서를 군장들 앞으로 내던졌다. 조선의 말이 사특하다.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이냐? 말하라 너희들은 알겠느냐? 나는 모르겠다. 이것이 뭐라고 해대는 말이냐? 정명수가 뒤쪽에서 말했다. 저들이 삶을 구걸하면서도,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으니...... 거기까지는 나도 알겠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냐? 폐하께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주십사는 뜻으로 아옵니다. 그 말이냐? 그 말이 이리도 요사스러우냐? 저들의 말이 본래 그러한지라......, 칸이 바닥에 펼쳐진 조선의 국서를 밟고 군막 밖으로 나갔다. 칸이 돌아보며 다시 고함쳤다. 너희들이 이런 종이를 받아서 나에게 들이미느냐? 종이를 돌려보내라. 칸은 조선의 문서를 접수한 문한관(文翰官) 두 명을 목 베었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321~322쪽) 나는 칸의 행동을 좇을 수는 없으나 칸의 답답함은 알 것 같았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벌봉으로 향했다. 바람이 몹시 불어 땀이 식은 몸을 떨게 했고, 오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니 더 힘이 들었다. 한봉성의 암문 앞에서 흰 개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쳐다보았다.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나도 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꼬리를 만 개가 옆으로 비켜섰다. 한 마리가 한참 산길을 따라오다 사라졌다. 목사리를 한 것을 보면 주인이 있을 것인데 개는 저 혼자 떠돌고 있었다. 벌봉은 동문과 북문사이에 있다. 바로 옆이 제3 암문이다. 벌봉 근처 갈림길에서 한참이나 봉우리를 찾았다. 벌봉은 우뚝하니 높은 곳에 서 있었다. 암문 밖에서 보면 벌처럼 생겼다고 해서 벌봉이라 했다. 봉암성의 봉자가 벌 봉(蜂)자인 것을 보면 그럴 듯도 했다. 직접 나가서 보니 벌봉은 벌의 뒷등을 닮아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 성 안을 바라보았다. 성 안은 멀어 희미했고,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지난날 칸의 병사들은 드넓은 초원에서 왔으니 지금의 나보다 훨씬 눈이 밝아 성 안을 세세히 보았을 것이다. 병자년과 정축년 이곳에서 칸의 병사들은 성 안의 묘당과 성첩 군사들의 동태를 살폈다.
한봉이나 벌봉, 망월봉 등 산성 외곽의 세 봉우리들은 모두 산성의 안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한봉(418m)은 산성에서 가장 높은 청량산 꼭대기의 수어장대(497m)보다는 낮았으나, 남동쪽에서 성 안의 행궁을 내려다볼 수 있었고, 가장 높은 벌봉(512m)은 동쪽에서 성 안의 동향을 대체로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망월봉(502m)은 벌봉보다 낮았으나 터가 넓었고, 성 안이 한눈에 보였다. 병자년 청장(淸將) 용골대는 이곳에다 포진지를 구축했다. 청병들이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고 터를 닦았다. 조선인 포로들은 식량과 땔감과 병장기를 운반했다. 포대가 완성되자 용골대는 포구를 성안 행궁과 관아 쪽으로 조준했다. 병자년이 다 가도록 청병은 성 안을 향해 포를 쏘지 않았다. 정축년 초 임금이 북경을 향해 망궐례를 올리는 것을 보고도 포를 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궁벽한 산성의 외곽에 칸이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요동이 불안했고, 명과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루빨리 뒤를 정리해야 중원으로 갈 수 있었다. 성 안의 명분만 남은 말들을 멈추게 하고, 조선의 임금을 성 밖으로 나오게 하려면 포를 쏘아야 했다. 그래야 저들은 저들의 처지를 알 터였다. 이것은 칸의 생각이기도 했다. “조선 왕의 처소가 어디냐? 오늘 몇 방을 보내야겠다. 조선 왕의 처소는 부수지 말고, 그 언저리를 바싹 겨누어라. 포병들이 달려와 홍이포 다섯 문에 장전했다. 방포하라.”(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323쪽) 홍이포의 포탄은 임금이 성을 나가기 며칠 전까지 성 안으로 떨어졌다. 때로는 반나절에 그치기도 했으나 어느 날은 종일 포탄이 날아왔다. 임금은 행궁 뒷문으로 빠져나가 산으로 피했다. 금군들이 그 앞과 뒤를 호위했다. 임금이 출성을 약속하고 칸에게 국서를 보냈으나, 포격은 멈추지 않았다. 최명길 등이 용골대와 항복의 절차를 다시 논의했다. 1월 27일, “신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 날을 머뭇거렸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스스로 나아가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만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와 수천 리의 생령을 폐하께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소서.” 최명길이 더욱 공손해진 국서를 들고 청의 진영으로 갔다. 정축년 정월이 다 가고 있었다. 이제 곧 성문이 열릴 터였다.
남한산성의 외성은 청의 간섭이 약해진 숙종 연간(봉암성-1686년, 한봉성-1693년, 신남성-1719년)에 축조되었으나 이후 보수가 되지 않아 무너지고 허물어져 있는 곳이 많아 황폐했다. 성곽길 또한 가파르고 정비가 되지 않아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산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또 성곽 아래는 경사가 급한 낭떠러지라 몹시 위험했다. 벌봉을 보았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시 남문을 가기 위해 길을 찾았다. 처음에는 북문으로 가 성안을 가로질러 남문으로 가려했으나, 단지 몇백 미터 가깝다는 이유로 지름길을 택했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것도 이유가 됐다. 내려오는 길에 현절사(顯節祠)가 있었다. 처음 표지판을 보곤 현절사가 절인 줄 알았었다. 한데 와서 보니 현절사는 사당이었다. 칸의 군대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 홍익한, 윤집, 오달제 삼학사의 충절을 기려 숙종 때(1688년, 숙종 14년) 유수 이세백(李世白)이 세운 사당이라고 했다. 1693년 봄에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림)되었고, 1699년에는 같은 뜻을 가졌던 김상헌과 정온 두 사람을 더 추가해 모셨다. 사당을 들어가는 출입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한참을 서서 현절사를 바라보았다. 명(明)에 대한 충절이 고고했던 이들은 이제 모두 죽었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 칸의 국문 끝에 참형당했고, 김상헌은 심양으로 끌려갔다 돌아와 1652년 82세에 천수를 누리고 조선에서 죽었다. 정온 또한 덕유산에서 은거하다 1641년 72세를 일기로 죽었다. 난 그들의 뜻이 옳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의 기개만은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산길을 빠져나오니 지수당이 보였다. 지수당 옆 도로변에 지난번 표지판에 더해 ‘서흔남 묘비’라는 진한 갈색 표지판이 큰 기둥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난번 지수당을 찾았을 때 없었던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의 관심이 산성 안으로 옮겨진 것일 것인데....,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서흔남 묘비가 있는 곳과는 달리 엉뚱한 곳이었다. 묘비가 숨어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올 때마다 산성의 안내가 친절해지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관리사무소라 생각하며 성안을 가로질러 다시 남문으로 왔다. 서른아홉 개의 선정비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줄을 맞춰 서 있었다. 남문에 도착하니 3시 43분, 3시간 이상을 성벽 길을 걸었다. 집에서 출발해 남문까지 올라온 시간을 합치면 4시간을 넘게 걸은 것이다. 왼쪽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천천히 걸으며 산성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골짜기를 타고 온 골바람 소리가 영춘산 산마루에서 파도 소리처럼 들려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해는 이제 막 산을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각으로 기운 햇살은 싸늘하고 차가웠다. 바람막이와 조끼의 지퍼를 올려 스며드는 한기를 막았다.
나는 생각했다. 호란 당시 남한산성은 단단해 외부에서 허물기 어려웠고, 적들이 쉽게 함락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옹성(甕城)들이 밖으로 길게 나와 성안을 감추며 밖을 내려다보았고, 네 곳의 장대(將臺)는 우뚝해서 장수들이 성 밖을 내려다보며 지휘하기에 좋았다. 성벽은 옹골차게 맞물려 있었고, 여장(女牆,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의 기와도 탄탄했다. 성안에는 1만 명이 넘는 병사가 있었고, 각 지방에서 근왕병들이 산성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 또한 성 안과 성 밖이 통하면 나아질 터였다. 그리고 이미 이곳은 전(前) 왕조에서 몽골의 공격을 막아낸 적이 있었다. 단지 우려되는 것은 망월봉, 한봉, 벌봉 등 고지에서 적들이 포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행궁의 조정에서도 이러한 의견들이 자주 거론됐으나, 병권을 쥐고 있는 체찰사는 “군부를 모시고 있는 성 안에서 군병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며 애써 외면하고 방비하지 않았다. 만약 성 안의 병사들이 이들 봉우리를 선점하고, 천자총통 등의 화포로 청의 진영을 공격했다면 청병은 산성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산성은 안과 밖이 트여 자유로웠을 것이고 전쟁의 양상 또한 달라졌을 것이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 칸에게 이로울 것이 없었다. 칸에게 중요한 것은 중원이지 배후인 조선이 아니었다. 한발 물러서 종내 성이 청병을 견디지 못했더라도 정축년과 같은 굴욕적인 임금의 항복은 없었을 것이다. 병자년 조선은 성 밖 봉우리들은 내버려 두었고, 칸의 군대는 그 봉우리들을 차지했다. 전쟁의 승패가 이것으로 갈렸다. 홍이포가 부른 결과가 이만큼 컸다.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지금 한·중 문제를 보면 380년 전 병자년 산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그때와 달리 지금은 ‘화(和)’의 목소리가 크고 ‘전(戰)’의 목소리는 작다. 중국은 싸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문제고, 한국은 경제가 문제다. 두 문제의 뿌리는 북한의 핵에서 나왔다. 그러나 지금 한쪽은 ‘화(和)’를 강조하며 애써 말하길 꺼려하고, 또 한쪽은 ‘전(戰)’을 이야기하나 중심이 없고 목소리가 흩어져 잘 들리지 않는다. 국민들은 걱정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