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살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항복하라”
“동문은 앞이 트여서 개울 너머 산에서 쏘는 청병의 총알과 화살이 문루에 닿았다. 동문 쪽 성첩에 방패가 모자랐다. 병조는 성안 사찰의 마룻바닥을 뜯어내자는 논의를 펼쳤다. 귀동냥한 별감들이 행궁 안팎을 드나들며 말을 옮겼다. 사찰은 시주로 받아 둔 무명 열 동을 거두어 병조에 바치고 마룻바닥을 살렸다. 갇힌 성 안에서 중들은 무명을 곡식과 바꿀 수 없었다. 병조는 관아 객사와 질청(秩廳, 관아에서 구실아치가 일을 보던 곳)의 문짝을 뜯어냈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125쪽)
성의 남동쪽에 있는 동문(東門)은 광주(廣州)지방과 연결되는 출입문이다. 산성의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됐다. 1624년(인조 2년)에 축조되었고, 1779년(정조 3년)에 개축해 좌익문(左翼門)이라 불렀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높이 4m, 폭 3.1m이며,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들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양식이다. 용머리는 망와(望瓦, 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암막새)로 마감하고 연등(삿갓)천정을 했다. 12월 31일 동장대 가는 길에 동문을 거쳐 지나갔다. 성문은 닫혀 있었고, 문루도 올라갈 수 없게 막아 놓았다. 동문은 아직도 보수 중이었다. 성문 오른쪽 성벽은 1973년 남한산성-광지원 간 도로 확장 공사로 잘려나가 성벽이 이어지지 못했다. 안타까웠으나 도리 없는 일이었다. 성벽을 만들어 잘린 곳을 잇고, 차로를 지하로 뚫는 방법도 생각해 볼 일이다. 남한산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마땅히 복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동문은 정축년(1637년) 초사흘 경상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쌍령(雙嶺,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청군에 크게 패하지 않았더라면 근왕병을 이끌고 들어왔어야 할 문이었다. 병자년과 정축년에는 훈련도감 대장 신경진(申景禛)이 지키고 있었다.
정축년 1월 초 동문 부근으로 접근해 탐색전을 벌이던 청군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나, 1월 11일부터 산성 주변을 둘러싸고 압박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릉과 탄천 일대에 있던 병력 1만 명을 차출해 수원과 용인, 여주와 이천 방면으로 다시 배치하며, 근왕병의 산성 접근을 더욱 확실하게 차단했다. 청군은 성 안이 안심하고 있는 강화도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동문을 막아 근왕병이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강화도가 무너져야 성 안의 임금이 성 밖으로 나온다.” 용골대의 생각이었고, 이것은 곧 칸의 생각이었다. 1월 16일 칸은 망월봉(望月峰)에 초항(招降) 깃발을 내걸고 임금의 항복을 종용했다. 다음 날 국서를 보냈다. “네가 살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항복하라. 네가 싸우고자 하느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한 번 겨뤄보자. 하늘이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 1월 18일 행궁의 묘당에서 최명길은 칸에게 보낼 국서의 초안을 완성했다. 비변사의 신료들이 돌려보고 문구를 수정했다. 칸을 ‘폐하(陛下)’라고 호칭한 것은 지웠다. 내용은 지난번 국서보다 더욱 공손했다. “소방(小邦)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대국의 운세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지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命)을 받들어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예절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을 따를 것입니다.” 최명길이 쓴 국서를 김상헌이 찢었다. 임금이 물었다. “양식이 지탱하기에 충분하고, 병력이 적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임금은 일찍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탄식했다. 주변의 신료들이 눈물을 떨구었고, 세자의 통곡소리가 묘당 밖으로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같은 날 논란 끝에 완성한 국서가 청군 측에 전달됐으나, 청군 지휘부는 국서 받기를 거부했다. 국서에는 임금의 출성(出城)에 대한 문구가 없었다. 사신들이 그냥 돌아오자 비변사는 ‘폐하’라는 글자를 추가했다. 1월 19일 한봉과 벌봉에서 쏜 홍이포의 포탄이 성안으로 날아들었다. 성첩이 무너지고 행궁의 지붕과 기왓장이 부서져 내렸다.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성 안은 혼이 빠졌고 공포에 떨었다. 임금은 산성에 있었다.
임금이 칭신(稱臣)했으나, 칸은 임금의 출성을 강요했다. 명나라조차 자신에게 떨고, 몽골마저 항복했는데 바다에 궁벽하게 면한 작은 나라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명의 번국인 조선도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며 명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지 않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는 명(明)의 귀순자들이 동요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 칸의 절박함이 있었다. 조선의 임금은 반드시 성을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임금에게도 출성을 거부하는 이유가 있었다. 임금은 칸이 자신을 심양(瀋陽)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출성 이후 왕으로서의 존엄이 무너져 왕위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이것은 임금의 절박함이었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신료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는 반정이라는 정변을 통해 임금이 된 왕이었다.
척화파를 묶어 보내라는 칸의 요구 또한 임금과 조정을 괴롭게 했다. 사간 이명웅이 제일 먼저 자신을 묶어 보내라 나섰다. 이조참판 정온도 나섰다. 예조판서 김상헌, 교리 윤집, 전 수찬 오달제, 부호군 윤황 등이 함께 묶여 가겠다고 자원했다. 최후의 일전을 벌이자는 주장도 나왔다. 문신 김수현과 독전어사(督戰御史) 황일호 등은 국서를 다시 써서 보내라고 촉구했다. “이제 노약자들을 먼저 죽이고, 남은 양식을 모두 태워 버린 뒤 날랜 장정을 뽑아 그대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자 한다. 남한산성이야 완전히 망할지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은 들고일어나 자식은 아비의 원수를 갚고, 아우는 형의 원수를 갚고, 신하는 임금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대들은 부질없이 만대의 원한을 맺게 될 것이다.” 성안에 남은 양식이 며칠 되지 않았고, 병사들은 추위와 주림으로 지쳐있었다. 지친 병사들과 굶주린 성안의 백성들은 하루빨리 성문이 열리기를 고대했다. 깨져서 열리나 열려서 깨지나 어차피 열릴 문이었고 열려야 할 문이었다. 사간들의 말은 그냥 말(言)먼지일 뿐이었다. 임금은 이들이 쓴 국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삼사 언관들이 요청한 면담도 모두 거부했다. 임금은 칸의 분노를 사는 것이 두려웠다. 1월 22일 조정은 척화한 신료들에게 자수하라 권고했다. 23일에는 수원과 죽산 출신의 초관(哨官) 수백 명이 행궁 앞으로 몰려와 척화신을 내놓으라고 시위하며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26일에는 성첩의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장졸들이 묘당에 몰려와 척화신을 내보내라 소리쳤다. 산성은 내부로부터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연휴 둘째 날은 12월 31일이었고, 2017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가볍게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서 산성으로 향했다. 12월 10일 이후 산성을 오를 기회가 없었다. 주말에는 전날의 음주로 지쳐있었고, 또 주말마다 자주 행사가 있었다. 지난밤 눈이 내렸는지 산성을 오르는 길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집을 나서고 이내 아이젠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다시 집을 다녀오기가 귀찮아 그냥 산을 올랐다. 잘못된 생각이란 것은 금방 드러났다. 응달 길은 눈이 녹지 않아 얼어서 미끄러웠고, 양달 길은 눈이 녹아 질어서 또 미끄러웠다. 오르는 내내 자주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영하 2도라는 기상청의 온도에다 바람이 더해진 산길은 능선에서는 차가웠고, 바람이 없고 햇볕이 드는 언덕 아래서는 봄처럼 따뜻했다. 집을 나설 때가 11시 40분이었는데 남문에 도착하니 12시 34분이다. 성 안을 가로질러 바로 동문으로 향했다. 오늘 산행의 목표는 남한산성의 외성(外城)인 봉암성(蜂巖城)과 한봉성(漢峰城), 그리고 벌봉과 한봉을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동문으로 먼저 가야했다. 동문에 도착하니 12시 56분이었다. 동문은 지대가 낮아 계단을 쌓아 높이고 그 위에다 성문을 지었다. 때문에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했다. 물자의 수송은 수문 남쪽에 있는 제11 암문을 사용했다. 동문을 소개하는 표지판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산성의 외성을 가자면 먼저 동장대 쪽으로 가야했다. 동장대로 가는 길은 다른 성첩길보다 넓었으나, 오르막이 많고 가팔랐다. 지난여름 이 길은 성벽 보수공사로 막혀 있어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직도 성곽 왼쪽으로는 자제 운반을 위한 모노레일이 깔려있고, 성벽 바깥은 보수공사를 위한 비계가 길게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들이 모두 치워져야 동쪽 성벽을 제대로 볼 수 있을 터였다. 동장대는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병자년 이곳에서는 수어청 좌영장(左營將)이 휘하 장졸들을 지휘했다. 숙종 연간에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등 외성을 신축하고 돈대(墩臺)를 설치하며 동장대는 군사적 효용성이 없어졌다. 정조 연간에 성을 개축할 때 서장대와 남장대는 개축했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허물어진 채로 그대로 두었다.
동장대 터를 지나 제3 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 이 암문은 남한산성 16개의 암문 중에서 가장 크다. 문루만 없다 뿐이지 홍예도 있고,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실제 주출입구였다. 암문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봉암성문이다. 동쪽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한봉성의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봉암성문을 나와 조금 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으로 가면 벌봉이고, 오른쪽으로 계속 가면 한봉으로 가는 길이다. 먼저 허물어진 성곽길을 따라 한봉으로 향했다. 벌봉으로 가려면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와야 했지만 정축년 칸이 머물렀다는 한봉(칸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예전에는 汗峰이라고 썼으나, 지금은 漢峰이라 쓴다.)을 먼저 보고 싶었다. 한봉까지는 대략 1.6km의 거리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햇볕에 녹은 눈이 질척거렸고, 눈이 덮인 산길은 길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었다. 한참을 가다 한봉성의 끝 언저리에서 한봉을 찾았다. 한봉은 낮은 언덕이었다. 그 정수리에 다듬지 않은 표지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표지석에는 한글로 ‘한봉’이라 세로로 쓰여 있었고, 그 아래 가로로 작게 418.1m라 쓰여 있었다. 시간은 오후 2시 10분이었다. 동문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1시간 14분이 걸렸다. 허물어진 성벽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산성의 동쪽 성첩과 성 안으로 장경사 절이 보였다. 더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것이 행궁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봉 마루턱으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