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흔남, 사노가 당상이 되다(2)

상 안과 성 밖을 통한 공로로 벼슬이 대부에 오르다

by 김무균

날쇠는 성을 나갔던 동쪽 성벽의 배수구를 뚫고 새해가 되어 돌아왔다.(나만갑의 병자록에는 서흔남이 임금의 유지를 가슴에 품고 1월 12일 성을 나가 27일 성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대장간을 찾아온 김상헌에게 이배재(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청량산과 검단산 산줄기를 넘는 고개.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북쪽 도성의 임금과 부모가 계신 고향에다 각각 절한다고 해서 이배(二拜)재라 부르게 됐다.) 고개 너머 경기, 충청의 여러 고을을 다녀온 일에 대해 고했다.


「서날쇠는 안성, 평택, 수원, 오산, 입장, 천안을 거쳐서 추풍령 아래 영동에서 길을 돌려 다시 남한산성 쪽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수원에서 안성 쪽으로 길 없는 산속을 헤집고 나갈 때, 거기까지 올라온 전라 감사이시방(李時昉, 산성의 수어사 이시백의 아우이다.)의 군진을 만났다. 전라 감사는 주리고 지친 군사 오백을 거느리고 있었다. 광주에서 안성까지 올라온 전라 감사는 도원수(당시의 도원수는 김자점이었다.)의 지휘에 닿지 못했다. 남한산성이 멀지 않았으나 전라 감사는 소규모 부대로 산속에 포진한 채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했다. 양도가 끊어진 군사들이 산의 양지쪽 사면을 뒤져서 밤을 줍고 있었다. 서날쇠는 전라 감사에게 임금의 격서를 전했고, 전라 감사가 다시 멀고 가까운 지방 관군 부대들에 격서를 돌렸다. “전라 감사가 문서를 전하지는 않더냐?” “문서는 없사옵고, 여러 고을의 감병사들이 이미 남한산성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도원수의 지휘에 직접 닿지 못해서 진로가 엇갈려 부대를 합치지 못했고, 또 청의 기병들이 들을 가로막아 뚫고 나갈 길을 찾고 있다고 전하라 하였사옵니다.” 김상헌이 서날쇠의 두 손을 잡았다. “장하다. 네 너를 천거하여...” “성 안은 별고 없으셨나이까?” “아무 일 없으나, 갇혀서 답답하구나.” “봄에는 조정이 나가는 것이옵니까? 조정이 비켜줘야 소인들도 살 것이온데...” 김상헌은 국서가 이미 삼전도로 떠났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318~319쪽. 서흔남이 격서를 전하고 도처에 일어난 근왕에 대한 이야기들을 원래는 여기에 썼었으나, 분량이 많고 전말이 어지러워 따로 떼어 다음 편에 쓰기로 했다. 소설 '남한산성'에는 김훈의 말이 글로 압축되어 근왕의 앞과 뒤를 세세히 알기가 쉽지 않다.)


서흔남이 성 안과 성 밖을 수차례 통한 일들은 여러 기록들이 전한다. 인조실록에 “성 안에 사는 서흔남과 승려 두청(斗淸)이 모집에 응하여 나갔다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의 장계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고, 정조실록에도 “서흔남은 사노에 지나지 않는데 노병(虜兵, 청나라 군사)이 세 겹으로 에워쌌을 때 홀몸으로 빠져나가 능히 삼남의 여러 도에 명을 전하였고...”라는 내용이 보인다. 또 병자년 성 안에서 관량사를 지냈던 나만갑이 지은 병자록에 보면 「서흔남이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서 병든 사람이라 산성에 들어가지 못한 자인 척하고, 바지를 벗고 다 해진 옷을 입고 기어서 가니 구슬 달린 면류관을 쓰고 누런 옷을 입은 사람이 누런 장막 안에서 철판 위에 앉아 있었으며, 숯을 피워 철판을 데우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반드시 청나라 칸 같았다고 했다. 또 서흔남이 말하길 “그는 제 행색을 보고 가련하게 여겨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저는 손을 쓰지 않고 입을 대고 먹고 앉아서 자리에다 오줌을 쌌더니 적이 모두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무릎으로 걸어서 앞으로 나가다가 적이 있는 곳에서 약간 멀어지자 일어나 내달렸으며, 목책을 넘어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청나라 임금은 저를 자객으로 의심하고, 다음날 삼전포(三田浦, 삼전도)로 군진을 옮겼습니다.”라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서흔남은 평소 일정한 직업이 없어서 무당 노릇을 하거나 대장장이로 업을 삼기도 하였다. 지금 이와 같은 일을 하였으니 사람은 누구나 멸시해서는 안 된다. 이 일 -성 안과 성 밖을 통하여 전령한 일-로 그에게 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시대 문신 정삼품의 품계)의 직을 주었다.” 같은 책에 나오는 서흔남에 대한 기록이다.


글을 시작한 지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글은 중간에 끊어져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달이 바뀐 12월의 첫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어제의 음주를 잠시 달랜 뒤 지수당 근처에 있는 서흔남의 묘비를 다시 한번 찾기로 했다. 또 간 김에 가까이 있는 동문과 지나치기 쉬운 수문(水門)도 다시 한번 찾아볼 요량이었다. 산을 오를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서니 오전 11시 56분이었다. 기온은 영상 6도였고, 바람이 없어 봄처럼 포근한 날씨였다. 어젯밤 가는비가 내렸는지 산길과 나무와 숲이 젖어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흙과 돌과 나무들이 미끄러웠고, 얼었다 녹은 길은 질어서 질척거렸다. 가을과 겨울 두 계절에 떨어진 낙엽들이 길 위를 덮고 있는 곳은 어디에 발을 놓아야 할지 조심스러웠다. 남문을 도착하니 12시 56분이었다. 남문에서 성첩길을 따라 동문으로 향했다. 지난밤의 비를 생각하며 병자년 겨울 성첩을 생각했다. 병자년 겨울의 비는 차고 날카로워서 성첩을 지키는 병사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병사들은 가마니를 어깨에 덮어 찬비를 피하고, 바닥에 깔아 올라오는 냉기를 막았다. 추위에 곱은 손을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발을 굴렀으나, 종내는 손과 발이 얼어 동상에 걸렸다. 지금 동문으로 가는 성첩길 대부분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 그날의 추위와 곤궁함과 절박함을 느낄 수 없다.


동문은 그 자리에 있었다. 성 주변은 보수작업을 하는지 몇몇의 인부들이 둘러쳐져 있던 출입금지 줄을 떼어내고 계단에서 무언가 열심히 손질을 하고 있었다. 성문 안과 밖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서흔남의 묘비가 있는 지수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수당과 관어정에는 바람소리 하나 없었다. 지난날 일었던 연못의 물결도 제풀에 지쳤는지 잠잠해서 평화로웠다. 지수당 앞에 새로운 표지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흔남 중의 흔남 서흔남, 보통 사람들의 롤모델 서흔남’이란 표지판이었다. 표지판과 제목의 글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 내용 또한 기존 묘비 옆에 있는 안내문과 비슷했는데, 최근 영화 ‘남한산성’에서 ‘서날쇠’가 화제가 되면서 관리사무소에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새롭게 세운 듯했다.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서흔남이 수어청 병사의 사노였는지, 아니면 수어청에 딸린 노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서문 밖 ‘널무니’(현재의 하남시 감이동이 그곳이다.)에서 천민으로 태어났다는 말도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대장장이었다거나 무당 일을 보았다거나 기와를 굽는 와장(瓦匠)을 했다는 기록들은 사실인 듯했다. 묘비의 표지판 안내문에 기록된 ‘효종 연간에 남한산성 성벽과 4대문 문루, 동북창사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해 목재조달업무를 관장했다.’는 내용이 이러한 그의 출신과 직업을 추측하게 했다. 또 나만갑의 ‘병자록’에서 그가 한 행동들을 볼 때 그가 무당, 광대 일을 했다는 것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단지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한 줄 기록의 뼈에다 살을 붙이고 핏줄을 만들어 산성의 중심에다 서날쇠를 가져다 놓은 김훈의 상상력이 그것이었다. “서날쇠는 연장을 구하러 온 사람의 몸매와 근력, 팔다리의 길이와 허리의 곧고 굽음을 잘 살펴서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키 작은 자와 키 큰 자의 연장을 달리 만들어 주었다. 돌이 많은 땅의 호미와 모래밭의 호미도 달리 만들었다.....서날쇠는 양평에까지 소달구지를 보내 참나무를 실어 와서 땔나무로 쓰거나 숯을 구워냈다. 그의 불은 고요하면서 맹렬했고 맑아서 연기가 나지 않았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53~54쪽)라든가 “서날쇠의 대장간은 화덕이 일곱 구멍이었다. 모루장이, 숯장이, 풀무꾼, 허드레꾼이 한 조가 되어 화덕을 한 개씩 맡았다. 서날쇠는 일꾼들을 지휘해서 망가진 병장기들을 고쳤다. 서날쇠의 화덕은 뜨거웠다. 모루장이들은 웃통을 벗었다. 어깨에 힘을 넣고 허리를 돌려 망치를 세울 때 모루장이들은 방귀를 뀌어 댔고, 겨드랑이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망치가 모루를 때릴 때마다 달군 쇠에서 불똥이 튀었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122~123쪽)는 세밀하고 현장감 넘치는 묘사는 내가 지금 산성 안 서날쇠의 대장간 속에 잠시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의 글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는 있었으나, 그의 글이 어디로 나갈지, 어디에서 맺을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서남흔이 전령을 자원해 성 안과 성 밖을 통하고, 적진을 정탐한 것 또한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병자록 등과 같은 사서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사실일 것이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서흔남은 이 공으로 병자년(1636년) 12월 26일 도체찰사의 장계로 면천되고, 정축년(1637년) 1월에는 종 6품의 훈련원 주부(訓鍊院 主簿)를 제수받았다. 또 전후로 전령을 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당상의 직첩을 받았다. 12월에는 4품직인 서북만호를 제수받았으나, 병란 이듬해인 1638년(인조 16년)에 그만두었다. 1642년(인조 20년) “훈융첨사(訓戎僉使) 서흔남에게 궁시(弓矢)를 내려주라.”는 인조의 전교로 보아 서흔남이 그때까지 벼슬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병자년 임금이 산성으로 피난할 때 서흔남이 임금을 업고 성을 들어왔다는 일과, 그 상으로 임금에게 곤룡포를 하사받았다는 일이 지역 전설로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천민으로 태어난 사노였으나 대부로 녹훈되고 이름뿐인 허직(虛職)이지만 종 2품 동지중추부사의 직첩까지 받았다. 가의대부(嘉義大夫 조선시대 문관 종 2품의 품계) 서흔남, 사대부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노비가 당당히 당상(堂上, 조선시대 정 3품 이상 품계의 벼슬을 통틀어 이름)에 오른 인물이었다.


“임금의 출성(出城)으로 성안에 봄이 찾아왔다. 수어사는 조총과 창, 칼 등 병장기를 회수해 성안 무기고에 넣었다. 관량사의 창고에는 닷새 치의 군량이 남아 있었다. 수어사는 남은 곡식을 털어 군병들에게 먹였다. 성안에 들어온 뒤 군병들은 처음으로 포식했다. 김상헌은 서문을 나와 송파나루로 향했다.(김상헌이 실제 나간 문은 북문이었다. 서문은 오랑캐에게 임금이 항복하러 나간 문이었다. 김상헌은 차마 그 문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헤어질 때 수어사에게 나중 최명길을 만나면 안부를 전해 달라 했다. 성을 나갔던 서날쇠는 아내와 쌍둥이 두 아들과 나루를 배에 태우고 송파강을 건너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 생각하며 서날쇠는 웃었다.”(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359~363쪽) 세월이 흘러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이 산성을 찾아와 성첩을 위무하고, 성안을 위로했다. 장대에 올라 삼전도를 바라보며 그날을 비분하고, 또 강개했다. 다시는 병란으로 백성들이 주리고, 다치고, 죽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백성들의 삶은 늘 고단하고 팍팍했다.


서흔남의 묘비를 둘러보고 왼쪽 남문 가는 길로 방향을 틀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행궁과 북문이 나온다. 남문 앞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길 아래 잘 닦여진 터에 비석 숲이 보였다. 남한산성 안에는 총 39기의 비석이 있는데 행궁 복원 사업을 하면서 이곳에 30기의 비석을 옮겨 놓았다. 길 위 매점 옆에도 8기의 비석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몇 기를 제외한 대부분은 광주유수(廣州留守), 수어사(守禦使), 부윤(府尹), 군수(郡守)들이 이곳에 재직할 때 백성들을 정성스럽게 돌보고 편히 살도록 정사를 펼쳤다는 선정비(善政碑)다. 조선시대 선정비 중 20%만이 실제 선정을 펼친 목민관의 것이라는 어디선가 본 자료가 떠올랐다. 후손들이 한자리에서 한꺼번에 잘 보라고 모아 놓은 선정비, 후손들을 생각해 선정비의 이름들을 일일이 따지지는 않았다. 다만 관어정 임시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서흔남의 갈라진 묘비가 눈에 밟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가늘고 희미한 그의 기록과 유실된 그의 흔적과 초라하게 남겨진 그의 비석과 흩어진 그의 후손들에 대해 생각했다.


※참고자료 : 남한산성(김훈 著), 역사평설 병자호란(한명기 著), 병자년 남한산성 항전일기(나만갑 著),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네이버 지식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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