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와 부호로 된 알 수 없는 문장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 나를 쓰다 나를 읽다

by 김무균

참 독특한 책이다. 10월도 다 가고 있는 어느 날, 더위가 가시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하늘은 맑아서 청명했다. 서재에서 책을 읽다, 글을 쓰다 하고 있었다. 글은 잘 써지지 않았고, 요즘 쓰는 글들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를 멈추고, 조간을 펼쳐 읽다가 책 소개 하나를 보았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 나를 쓰다 나를 읽다’였다. 어떤 텍스트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화자’는 ‘나’인데, 화자인 ‘나’는 글 속에서 ‘그’가 되는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관찰을 통한 일종의 객관성 확보인가? ‘아, 좋은 발상이군. 나도 따라 해 봐야겠는데’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난 11월 5일 수요일, 한 주의 중간이었고, 인터넷 서점에서 1천 원 할인 상품권이 주어지는 날이었다. 하루키의 책 한 권을 주문하려다 금액 미달에 따른 배달비 문제로 책 한 권을 더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롤랑 바르트’였다. 서점에서는 오전에 책을 주문하면 오늘 중으로 책을 받아볼 수 있다고 했다. 정오가 되기 전 하루키의 달리는 책(‘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한 권과 롤랑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를 주문했다. 게시판의 글대로 책은 그날 저녁 늦게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저녁 약속에서 선배들이 가져온 와인과 2차에서 생맥주 한 잔을 더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 11시쯤 집에 돌아온 나는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한눈에 봐도 책이 들어 있을 것 같은 택배 상자를 보았다. 나는 “책이 벌써 도착했네.” 라며, 누가 들을 일도 없는 말로 반가운 척했지만, 포장도 뜯지 않고 택배상자를 서재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손만 씻고는 침대에 누웠다. 오랜만에 술을 섞어 마셨고, 최근 어느 날보다 많은 술을 마셨다.


11월 21일이나 돼서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며칠 전 책의 앞부분 몇 쪽을 설렁 읽어 본 적이 있는데, 책의 편집구조가 무척 낯설었다. 처음에 목차가 있고, 이어 제목 없는 프롤로그가 있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집, 마을, 거리, 가족, 결핵, 친구가 있는 크고 작은 사진이, 사진을 설명하는 문장과 함께 배열된다. 그것이 무려 60쪽까지 이어졌다. 아직 본문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고는 책을 덮었다. 11월 24일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능동적/반응적’이라는 ‘본문’ 텍스트가 나왔다. 그곳이 책 읽기의 출발선이라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그곳이 출발선임은 분명했다. 행간은커녕 줄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난독증인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장들은 글자의 나열이어서 그것이 기호인지, 혹은 부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뒤를 보니 아직도 읽을 분량이 270쪽이 남아 있었다. 장편소설 한 권 분량이었다. 몇 쪽도 읽지 못한 채 마시던 커피를 남겨두고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이나 하자고 집을 나섰다. 행선지는 남한산성을 오르는 중간 ‘전망데크’까지였다.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고, 먼 산이 미세먼지로 희뿌염하게 보여 바닥에 깔린 낙엽만 아니었다면 초봄 같은 풍경이었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도 땀이 배어 나와 간절기용 아우터의 지프를 열었다. 정찰기 한 대가 낮게 날며 몇 번이나 서울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커피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다음 읽을 텍스트는 ‘선택이 아니라 찬동’이었다. 전문(全文)의 일부는 이랬다. “무슨 사안인가? 이것은 한국 전쟁에 관한 거다. 소규모의 프랑스 자원 군인 몇 명이 북한의 덤불숲을 하염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부상당했고, 이를 본 어린 북한 소녀가 그를 자기 마을로 데려갔다. 그곳 농민들이 이 군인을 맞아주었다. 이 부상병은 그들 사이에, 즉 이 북한 주민들 사이에 남기로 했다. 선택하다(choisir). 이것은 적어도 우리의 언어이다. 이건 ‘비나베르’의 언어가 아니다. 사실상 우리는 어떤 선택 앞에, 대화 앞에, 변절, 아니 탈당 또는 떠나기 앞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점진적 찬동(assentiment) 앞에 있는 것이다. 군인은 그가 발견한 북한이라는 세계에 서서히 동의하게 된 것이다.”<미셀 비나베르, ‘오늘 또는 한국인들(1956)에 관하여’> 이 긴 문장이(이 책 속에서는 짧은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선택’이라는 단어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정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책은 이러한 텍스트들로 337쪽까지 이어졌다.


나는 책 읽기를 포기했다. 우선 내 학술적 욕구가 책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했고, 문자들의 나열에 불과한 내용을 내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독서 능력의 한계를 빠르게 인정하자 다음은 책의 거취가 문제였다. 나는 책을 서재 책꽂이에 장식용으로 꽂아 놓기로 했다. 책을 산 서점에 바이백을 알아보니 책값은 최상매입가가 6,300원에 불과했다. 22,300원을 주고 불과 얼마 전에 산, 밑 줄 하나 긋지 않은 책이었다.


※작가노트

‘미셸 비나베르’는 프랑스의 극작가다. 1956년에 공연된 ‘오늘 또는 한국인들(Aujourd’hui ou Les coréens)’이라는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라고, 책 속에 롤랑 바르트가 주(註)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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