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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Nov 14. 2023

시월, 위례 ‘平穩’

   한가한 일요일 오후, 늦은 아침을 먹고 오랜만에 산행이나 해 볼까, 생각했다. 핸드폰으로 농구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던 아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더니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싫다며, 자기는 천변川邊으로 농구하러 갈 거란다. 본래 함께 갈 것이라는 일 푼의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혹시나 하고 물어본 말에 아들 역시 당연한 대답을 한 것뿐이었다. 간단하게 산행 채비를 했다. 반바지에 반소매 셔츠를 입고, 혹시나 해서 바람막이 하나를 입지는 않고, 허리에 두른 후 하이킹용 허리색을 맸다. 허리색에는 지갑과 핸드폰, 손수건, 이온 음료 한 병을 넣었다. 신발은 트래킹화를 신을까, 등산화를 신을까 망설이다 ‘그래도 남문南門까지 가는 산행인데 산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지’, 하며 등산화를 신었다.

 

   행장을 본 아내가 “독감 걸릴 일 있어요?”라며 한 소리 했지만, 그냥 손으로 허리에 두른 바람막이를 가리키며 들은 체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니 1시 30분, 남한산성 남문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이었다.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파랬다. 허리색에서 핸드폰을 꺼내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하늘 몇 장을 찍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자 아파트 경계수로 심어놓은 화살나무가 서리를 맞아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고, 산행 초입 길의 덜꿩나무, 산수유나무도 가을 햇살에 빨갛게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산성山城을 오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서 놀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을 맞을 만추晩秋였고, 오늘은 일요일의 한가한 오후였다. 산길 주변에는 여름에 피었던 꽃들이 지고, 이름을 잊어버린 가을꽃들이 피었다. 지난해 가을에는 저 보라색 꽃 이름을 분명히 알았는데, 지금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코 엉겅퀴는 아니다. 그럼, 꽃향유인가? 아마 맞을지도 모르겠다. 꽃 이름을 알려주는 핸드폰 앱으로 확인하려 했지만, 산속이어서인지 통신이 잘되지 않아 포기했다. 하지만 꽃 이름을 모르면 어떤가? 꽃은 이름이 없어도 언제나 그냥 꽃일 텐데. 갑자기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그 꽃은 이름을 불러주어야 했다.

 

   산길은 바위와 자갈이 많고 낙엽으로 덮여 있었다. 발을 디딜 때면 바스락거렸고, 자주 발을 가려 놓아야 했는데, 바위를 덮은 낙엽에 미끄러지면 믿었던 등산화의 접지력도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뒷짐을 지고 느리게 걸었다. 생각해 보니 올여름 한 철은 무척 더웠고, 비가 잦았다. 그리고 가을은 절기보다 일찍 다가왔다. 그럼에도 어쩌면 이번 가을은 더 오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제 시간을 찾았던 기온이 다시 여름으로 회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혼자 걷는 길은 가끔 외로웠으나, 또 가끔은 생각들로 풍성했다. 난마처럼 헝클어졌던 생각의 타래를 가지런하게 해주기도 했고, 가지런하던 생각을 천 갈래로 나누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냥 앞꿈치만 보고 걸었다. 발걸음은 어긋남이 없었고 규칙적이어서, 잠든 아이의 숨결처럼 평온平穩했다. 이내 무념無念의 세상이 찾아왔다. 무념 속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었다. 잠깐 고개를 들었다. 제 할 일을 다한 잎이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그것을 몰아 이곳저곳에 흩뿌렸다. 낙엽은 시간의 뜻을 따르고, 바람 또한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問答無用,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고,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을이었고, 평온한 어느 일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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