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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Oct 01. 2021

위례, 구월 伐草

온 가족이 모여 하는 '슬기로운 벌초작업'을 기대하며....

9월 11일 토요일, 청주에 사시는 형님과 고향 마을 선산에 있는 아버지와 엄마 산소에 가 작은 조카와 함께 벌초를 했습니다.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일기예보에 걱정도 했지만 날씨는 다행히 하늘이 맑고, 바람이 불어 지난해 벌초 때처럼 무덥지는 않았습니다. 마을 앞 논둑길을 빙 돌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동제洞祭를 지내던 소나무(200년도 더 된 이 소나무는 두 갈래로 크게 자랐는데, 그 굵기가 어른 아름으로도 두 아름이 넘을 정도로 굵습니다.)를 지나, 큰 누나가 차디찬 얼음물에 갓난애기 시절 내 똥 기저귀를 빨았다는 이제는 없어진 샘터, 그 언덕을 지나 좁은 산길을 헤쳐서 뚫고 찾아간 아버지 산소부터 벌초를 시작했습니다. 조카가 풀을 베어내는 예초기를 들고 작은형과 저는 갈퀴와 낫과 톱을 들었습니다. 작은형과 저는 조카가 베어 놓은 풀들을 갈퀴로 긁어모아 치우고, 낫과 톱으로는 햇빛이 들지 못하게 산소를 가린 나뭇가지들을 잘라냈습니다.


산소들은 장소를 알고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만큼 잡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토질 때문인지, 아니면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 그늘이 져서인지 잔디가 잘 자라지 않고 잡풀만 무성했습니다. 특히 쑥대와 가시나무, 산딸기나무,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주 대가 억센 잡풀은 뿌리까지 깊고 넓어 캐어내는데 몹시 힘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산소에 흙을 더해 다지고,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는 잔디를 옮겨 심는 것을 가족들과 논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작은 조카가 제일 많이 고생을 했고(조카도 어느새 나이가 마흔 다섯입니다. 아들이 지난 5월 공군에 입대를 했답니다. 저에게는 손자인데, 명절 때 만나면 작은할배라고 합니다.), 작은형과 저도 나름대로 역할을 해 다섯 시간여 만에 벌초를 마쳤습니다.

벌초를 하기전 어머니 산소

아버지와 엄마 산소의 벌초를 마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에 들렀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는 작은집 사촌형이 한 주 전에 작은아버지 산소 벌초를 하면서 이미 말끔하게 정리를 해놓았습니다. 지난해부터 그렇게 하고 있답니다. 그 전에는 큰형님이, 큰형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작은형과 작은 조카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벌초를 해왔습니다. 큰 형수는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수십 년을 해왔고 같은 할배, 할맨데 당연하거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벌초에도 오지 않는지”라며 큰아들 욕도 잠깐 곁들입니다. 작은 조카가 고향 특유의 사투리로 “바쁘긴 뭐가 바빠여~”라며 엄마 말에 양념을 칩니다. 엄마가 삼촌들 앞에서 괜히 그러는 걸 조카는 모르나 봅니다. 아니 알면서도 형에 대해 섭섭한 뿔따구가 난 것일 겁니다. 저도 그동안 직장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벌초에 참여를 하지 않다가 작년 근 30년 만에 직장생활을 은퇴하고 처음으로 벌초하는데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벌초를 하기 전에 작은 형님의 말씀도 있고 해서 큰 조카에게 참석할 수 있냐고 전화를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에게 이미 말씀드렸다.”며 “바빠서 참석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당황스러웠지만 저도 그동안 저랬나 싶어 그냥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꼰대 기질에 한마디 하는 것은 잊지 않았습니다. “살면서 가족처럼 소중한 것도 없다. 가족에 대해 잘 생각해 봐라.”라고. 하지만 사실 저 또한 고향을 떠난 이래 한 번도 벌초에 크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으니 뭐라고 할 말은 없습니다.

벌초를 끝낸 뒤의 어머니 산소

하여튼 벌초를 무사히 마치고(말벌이나 땅벌 같은 독충에 쏘이지 않고) 작은형과 저는 청주와 서울에 있는 집으로 각각 돌아갈 채비를 했습니다. 조카는 집이 김천인데다 엄마 집에 왔으니 뭐 천천히 가도 될 것입니다. 출발하려고 하는데 큰형수가 “줄 것도 없네요.”라며 마당 가득 늘어놓은 호두(고향마을에서는 ‘추자’라 부릅니다.)를 검은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줍니다. 작은집 소유의 호두나무에 열렸던 것인데 작은집에서 딸 사람이 없어 작은 조카가 집에 들렀을 때 따서 햇볕에 말리려고 마당에 늘어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해서 보니 검은 비닐봉지 두 개가 차 안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아마 청주에서 작은형이 내리면서 호두 봉지를 그냥 두고 내렸나 봅니다. 작은형에게 택배로 보내드릴까 싶어 전화를 드렸더니 그냥 먹으랍니다. 사실 보내면 택배비가 더 많이 들 겁니다. 본의 아니게 두 봉지의 호두를 제가 다 먹게 생겼습니다. 임무를 완수한 흐뭇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면서 언젠가 온 가족이 모여(다 모이면 친가, 외가, 조카, 손자까지 40여 명이나 되는데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엄마를 생각하며 산소 벌초도 하고, 옛날 고리짝 이야기도 즐겁게 하는 ‘슬기로운 벌초작업’을 하는 날을 생각했습니다.


그럼, 모두들 오늘밤 Good night!


                     벌초

 

                                    김무균

오십이 넘어

어머니 무덤 벌초를 갔다.

이곳저곳 가시나무가 자라고

잡초가 우거지고

훍들이 무너져 내려

무덤은 더욱 낮아져 있었다.

가시나무 뿌리를 잡고

뽑아내려 애를 썼으나

뿌리는 뽑히지 않고

손만 자꾸 미끄러졌다.

어머니 가슴에 박힌

오랜 恨이 저랬을까?

울컥 가슴이 치밀어

흙묻은 목장갑으로

눈물을 닦다가

엄니니 목소리를 들었다.


시원타.

아이고 시원타.

목물보다 차고 시원타.

우리 손녀

우리 손자

살아 얼굴 한번 못봤는데

굴도 모르는 할매

머리 깎아주러

그 멀리서 왔더나.

고맙다.

기특하다.

애비야~

다음 추석엔 오지 마라.

이젠 오지 마라.

오늘이면 됐다.


P.S. :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써서인지 온몸이 결리고 근육통이 와 고생을 좀 했습니다. 사람 몸이란 게 어쩌면 이처럼 민감합니다. 마치 세상의 염량세태炎涼世態처럼.


https://blog.naver.com/moogyun/22251777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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