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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Oct 01. 2021

위례, 칠월 炎天

침엽수나 활엽수나 하나같이 헐떡거렸다

   아파트 단지에는 다양한 침엽수들이 있다.

하지만 소나무를 빼고 내가 이름을 알 수 있는 나무는 전나무와 측백나무 정도다.

이마저도 사실 정확하게 구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 침엽수(측백나무, 편백나무, 화백나무, 노간주나무, 하말라야시다, 개잎갈나무

가문비나무, 전나무, 잣나무, 구상나무, 주목 등등)들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게 나무에 이름표를 달아 주면 좋겠는데, 다른 나무들과 꽃나무에는 친절하게 이름표를 달아놓은 것과 달리

어떤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들 침엽수에는 이름표를 달아놓지 않았다.


   지구상에 자라고 있는 나무의 80%는 침엽수이고, 20%는 활엽수라고 한다.

침엽수는 무르고, 활엽수는 단단하다.

그래서 영어로 침엽수는 소프트우드softwood, 활엽수는 하드우드hardwood다.

침엽수는 싸서 건축자재로 많이 쓰이고, 활엽수는 비싸서 주로 가구 제작 등에 많이 사용된다.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안 우드Norwegian Wood’는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1960년대 영국의 가난한 이들이 쓰던 노르웨이산 싸구려 소나무 가구다.

폴 매카트니는 존 레넌의 '노르웨이안 우드' 작사 과정을 설명하며 노래 제목을 ‘Cheap Pine’으로 지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숲’, 비틀즈의 노래에서 책 제목을 따온 하루키 또한 이를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1987년 발표한 소설 ‘노르웨이의 숲’ 으로 전 세계에 하루키 붐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는 1988년 삼진기획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제 그대로 책을 출간해 쪽박을 찼으나, 1989년 문학사상사가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책을 재출간해 대박을 쳤다.)


   지난해 여름 읽은 ‘나무의 시-간’(김민식, 브레드)을 세 번째로 읽고 있다.

나무에 담긴 인문학적 이야기들이 내 취향과 부합하고, 나무에 대한 지식을 좀 더 배양하겠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동백나무에 대한 글을 읽다가는 오래전 산 이후로 꺼내보지 않았던

‘I,van Gogh, 반 고흐가 말하는 반 고흐의 삶과 예술’이라는 고흐의 그림책(2007년에 무려 38,0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을 책꽂이에서 꺼내 펼쳐보기까지 했다.

‘자화상’속 뒤쪽 벽면엔 진짜 책에서 말한 것처럼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우키요에浮世繪가 걸려 있었다.

고흐가 소품으로 활용할 만큼 19세기 유럽엔 일본 바람이 무섭게 불었다.(우키요에는 오랫동안 건조한 동백나무-Camellia, 질기고 단단한 수종이어서 판화의 밑판으로 애용되었다.- 판재에 그림을 새겨 인쇄하듯 찍어낸 판화다. 일본이 태생인데 당대의 풍속과 풍경을 전통 방식으로 판각했다. 그렇듯이 동백나무의 학명도 Camellia Japonica다. 하지만 동백은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도 많이 자란다.)


자주 뒷산을 오른다. 남한산성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한다.

나무들은 구불구불 자란 활엽수들이다. 대부분 참나무 수종이고,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도 틈틈이 자라고 있다.

그 사이에 지구상에 80%에 달한다는 침엽수의 대표 수종 소나무가 드문드문 자란다.

다른 침엽수들은 내 안목으로는 이름을 구별을 할 수가 없다.

산을 오르는 길가에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쥐똥나무, 조팝나무, 좀작살나무, 화살나무 등 키 작은 관목들이 줄지어 서 있다.

길가를 좀 벗어나면 산수유, 왕벗나무, 이팝나무, 산딸나무 등이 뿌리를 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그 옆 푸른 잎을 틔우지 못하고 고사枯死한 나무들을 늘상 보아서 일게다.

무료함과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나오는 뱃살(대붕이 하늘의 높음을 알아 제 뜻대로 날고, 고래가 바다의 넓음을 알아 한없이 마시듯 내 배 또한 그랬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해 뒷산을 오르던 어느 날, 칠월은 염천炎天이었고, 그 아래서는 잎이 넓은 나무들이나 잎이 가는 나무들이나 모두가 하나같이 헐떡거렸다. 저것이 나무들의 삶이라면 내 삶은 또 저 나무들과 무엇이 다를까.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산길을 걸었다. 정상頂上도 아닌 곳, 그저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 흐린 눈을 들기 전까지.


   한가한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오래전 고사해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知後彫’를 무색케 했던, 팔뚝만큼 굵었던 창문밖 전나무 세 그루가 베어져 사라지고 없었다.(5년 전 입주할 때 조경수로 심어져 있던 전나무는 이사 후 일 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 죽었다. 일 년쯤 지나자 관리사무소에서 죽은 나무를 베어 내고 그 자리에 다시 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또 전나무는 고사했다. 토양 때문인지, 나무 자체의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식재 방법 때문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관리사무소에서는 전나무가 죽은 채로 정원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바늘같은 잎사귀들이 갈색으로 말라 눈에 거슬렸으나, 그런대로 거실 창문을 가려줘 작은 소임이나마 하고 있었는데 막상 사라지고 나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사무소에서 언제 다시 나무가 베어진 곳에 나무를 심어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사枯死한 나무가 오늘 조경작업으로 베어지기까지도 1~2년이 걸린 듯했다.


※사족 : ‘노르웨이의 숲’의 제목은 마지막 순간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4월 볼로냐에서 열린 도서박람회에 온 코오단샤의 직원에게 최종 원고를 건네주었는데, 그 직전까지 이 소설에는 다른 제목이 붙어 있었다. 물론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은 선택지로 쭉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지나치게 딱 들어맞는 제목이었기에 나는 이것만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비틀스의 노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다는 것에도 저항감이 있었다. 세대적인 때가 너무 많이 묻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내 머리에 박혀 있어 다른 어떤 제목도 와 닿지 않았다. 마지막에 아내에게 읽히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을 말하지 않은 채, “어떤 제목이 좋을까?”하고 물어보았더니 “노르웨이의 숲이 좋지 않겠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결국 이 제목으로 정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아내는 그때까지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은 정말로 심볼릭하다고 생각한다. 원작 시를 읽으면서도 생각했지만 ‘Norwegian Wood’라는 말에는 언어 자체가 자연스럽게 쑤욱 부풀어 오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조용하고 멜랑콜리하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고상한 느낌마저 든다. 물론 여러 가지 해석 방법이 있겠지만 일본어로 대체한다면 역시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エイノ森)’이 가장 어원의 맛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작을 이야기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전집 6’에 나오는 작가의 변이다.


또 하루키는 책 제목 ‘노르웨이의 숲’을 확신하면서 ‘PARAVION’, 1988. 4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타이틀에 관해서인데요, 이는 비틀스의 곡명이죠? 이걸 깊은 숲 속에서 헤매고 있는 상징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글쎄요, 그런 셈이죠. 어떤 사람은 이 곡명을 ‘노르웨이산 목재가구’라고 번역했지만, 그렇게 번역해 버리면 정말 멋이고 뭐고 없어져 버리죠. 글자 그 자체로만 보면 아마 틀리지는 않겠지만요. 전 처음부터 이 소설의 제목은 ‘노르웨이의 숲’으로 할 생각이었거든요. 하지만 소설을 써나가는 사이 점점 마음이 흔들려서 바꿀 생각이었어요. 왠지 외국을 무대로 한 소설로 여겨지는 것도 싫고 비틀스의 곡명을 안일하게 인용했다고 여겨지는 것도 싫고 해서 여러모로 생각을 했죠. 중간에는 ‘빗속의 뜰’이라는 제목으로 밀어붙이려고 했어요. 이를 이탈리아어로 말하면 ‘이르자르디노 소토 라 피오자’거든요. 이 소설에는 비 오는 장면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이 제목은 좀 어두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탈리아어로 말하면 그럴듯하지만 그렇다고 제목을 이탈리아어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노르웨이의 숲’이 된 거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제목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단번에 정해진 건 아니에요. 정말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요. 저는 제목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건 고민이 되었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만큼이나 고민했죠.”


https://blog.naver.com/moogyun/222490328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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