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람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진 Apr 02. 2023

서로가 서로의 노래가 되어


지난주에는 수능이 있었다. 그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졌다. 훨씬 오래전의 기억들도 생생한 것을 보면 적어도 나에게는 수능이 그다지 중요치 않은 사건이었던 것 같다. 수능뿐만 아니라 고3 시절 역시 그랬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 1년이 가장 힘들고 치열했기에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하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한순간이 있다.



수능을 백일 정도 남겨둔 초가을의 날이었을 것이다.  8교시 영어 시간이었다. 그쯤 되면 저녁 어스름은 살짝 고개를 들고 반대로 아이들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다들 지친 몸뚱아리를 책상에 걸친 채 엎드려 졸기 바쁘다. 하루라는 것은 겪기에는 지치고, 보내기엔 아쉬운 그런 것이었다. 영어 선생님은 기타와 함께 교실로 들어오셨다. 이전에도 기타 치시는 모습을 많이 봤었기에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연주하러 가시나 보다.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 



오늘은 노래 하나 부르자. 그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것이 다였다. 엎드려 있는 아이들을 깨우지도 않았고, 딴짓하는 아이들을 혼내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악보를 받고는 하나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의아함 반, 의구심 반이었을 것이다. 몇 번 불러보고 수업을 하시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계절의 우리는 어떤 기대도, 욕심도 없이 그저 낯선 날들을 매일 버겁게 잘라내고 있었으니까. 그날 우리는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한 구절씩 선생님을 따라서, 그다음엔 조금 길게, 다시 첫 소절부터 중간까지, 몇 번을 반복하다 분침이 충분히 회전한 어느 순간부터는 한 곡을 완전히 부를 수 있었다. 잠결에 옹알이하던 놈, 영어는 까막눈이라 립싱크만 하던 놈, 서른 명이 노래를 불러도 잠만 잘 자던 놈들도 나중에는 다 같이 하나 되어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여러 번 그 감정을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늘 감정 앞에 단어가 무너지곤 했다.



노래를 부른 날로 12년이 흐른 지난 주말 친구와 선생님을 뵈러 갔다. 학교가 아닌 낯선 산촌이었다. 맥주를 따르고 과자 봉지를 뜯을 무렵 선생님은 스피커를 꺼내셨다. 좋아하는 노래 있니? 다시 12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선생님, 예전에 저희 반에서 한 시간 동안 노래 불렀던 것 기억나세요? 그땐 그랬지.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그런 날이 있었던 것 같아.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다른 게 없으니까 그랬지 뭐. 덤덤하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얼굴 너머로 드디어 그 기억에 꼭 맞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건 '위로'였다.



그날 선생님의 노래는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는 위로였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부르며 서로를 위로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우리를, 그리고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 계절 고3 학생들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우리에게, 그리고 울퉁불퉁한 속을 감싸 쥐기만 바빴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따뜻한 위로였다. 어쩌면 12년 전 그날이 요즘 따라 몹시 그리운 것도, 또 그 기억의 조각을 쥐고 산촌까지 오게 된 것도 지금 나에게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노래를 불러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더 행복해지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다지 어린 나이도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위로를 건네기보다는 위로받는 데 급급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나의 맘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려 하다가도 쉬이 다음으로 넘겨버리고 딱딱한 말은 식기 전에 던져버린다. 갈수록 더 조급해지고 성급해진다. 아는 것과는 별개로 날이 갈수록 어리석어지고 있다.



다음날, 선생님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떠났다. 언제든지 또 놀러 오렴. 그때는 더 재미있게 놀자. 네, 선생님 꼭 다시 오겠습니다. 다시 오겠다는 말이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처럼 돌아온다. 꼭 다시 찾아오자, 더 좋은 사람이 되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다짐을 건넸다. 그 다짐 또한 하나의 위로일 것이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우리도 짧은 인사를 건네며 헤어졌다. 나는 상행선 열차에 올라탔다. 어젯밤 나눈 대화가  스쳐 간다. 한 문장이 번쩍인다. 친구도 지금 똑같이 그 말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 2021년 11월 쓰다.

* 2023년 1월 고쳐쓰다.           


[출처] 서로가 서로의 노래가 되어|작성자 김무진





매거진의 이전글 동행同行: 함께 길을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