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동행을 응원하며
21살의 여름이었다. 그날 훈련소에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발령받았다. 새로 전입해 온 모든 신병들은 소속이 정해질 때까지 본부 인사처에서 대기하게 된다. 반나절 정도 대기한 후에 소속이 정해지면 본격적으로 군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낯선 곳에 홀로 남은 나는 인사처 사무실에서 긴장감과 무료함이 뒤섞인 정체 모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전부터 계속된 대기는 점심을 먹고 온 후에도 이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마네킹처럼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3시쯤 되었을까.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간부 한 명이 말을 걸었다. 대화를 나누며 나의 신상정보를 살펴보던 그는 잠깐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자고 했다.
각자 커피 믹스를 탄 종이컵을 들고 건물 밖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전날에 소나기가 온 덕에 풀내음이 진하게 퍼지던 6월의 맑은 날이었다. 그는 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것을 보고는 자식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밖으로 불러냈다고 했다. 그의 아들은 곧 중학생이 된다고 했고 그 까닭에 인사처를 거쳐 가는 신병 가운데 대학생들을 보면 종종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그러시냐며 힘없이 대답하고는 뻔한 이야기를 예상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 좋으냐, 학원이나 과외는 얼마나 했느냐, 학원비는 얼마나 들었냐와 같은, 정작 자식 교육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잡담들을.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달랐다. 수차례 들어왔던 구태의연한 이야기와 시작은 비슷했으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결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부모와 자식이 함께 노력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인사처에 근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육과 채용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합격자와 불합격자의 차이, 한번 불합격하더라도 다시 도전해 합격하는 사례를 아주 가까이서 지켜봤다고 했다.
그는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군 간부의 전형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무릇 군 간부라 하면 단계적인 발전보다는 극기와 같은 정신력을 강조하고, 교육보다 훈육에 익숙하며 과정보다는 결과에 과심이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10여 년 뒤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부터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일방적으로 주문하기보다는 자식 스스로 준비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아들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고 싶다고 했다. 아들과 나눈 대화의 일부를 나에게 들려주었는데 오래지 않아 그가 아들을 진지한 대화상대로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21살이던 나에게 학창 시절은 아주 생생했다. 학창 시절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내용을 가르치던 선생들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전년도 진학실적' 따위를 들먹이며 나와 친구들의 미래를 대충 재단하곤 했다. 그나마 재단 대상에 오른 아이들은 다행이었고, 거기에도 끼지 못한 아이들은 방치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모습은 집에서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부모님이 생각하는 진학 목표나 기대치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었다. 특히 그들이 계모임에 다녀온 직후나 미디어에서 입시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는 날, 시험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면 아직 닿지도 못한 내 미래가 쉽게 변경되거나 왜곡되곤 했다.
그는 아들과 나눈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식이 전문직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본인의 생각과 아들이 바라는 미래의 접점을 찾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끝에 한의사가 되는 것을 현시점의 장래 희망이자 대입의 목표로 정했다고 했다. 이것 역시 그가 제안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결정하여 알려준 것이라고 했다.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근데 나는 군부대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한의사는커녕 바깥세상, 대학 생활 자체도 잘 모른다고 봐야지. 그래도 아들을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해 봤어. 어쨌거나 자식 녀석이 가고 싶어 한다면 대학교 구경은 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주말에 아들과 같이 서울로 갔어. 경희대가 한의대로 유명한 학교라고 하더라고, 맞지? 그래서 경희대 정문에서 아들놈이랑 사진도 찍고 한의대 건물도 찾아가 봤어. 너가 나중에 이곳에서 공부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마침 대학생 몇 명이 지나가길래 붙잡고 부탁했어. 잠깐 시간을 내어, 어떻게 공부하면 여기에 합격할 수 있을지, 또 대학 생활이 어떤 건지 아들한테 짧게라도 알려달라고 했어. 커피는 내가 샀지. 다행히 다들 흔쾌히 도와주더라고. 너무 고마웠어.
그날, 나는 훗날아버지가 된다면 나 역시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대화를 시작할 때 묻고 싶은 것이 많다고 한 것은 그였지만, 정작 대화가 끝날 무렵에 더 많이 느끼고 배운 것은 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해줄 수 있는 별다른 조언이란 없었다. 그저 짧게 말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신다면 제가 아들이라도 열심히 공부할 것 같습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30분이 채 되지 않을 짧은 대화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잠시 나갔다 온 사이 나의 소속은 정해져 있었고 그 길로 짐을 챙겨 인사처 사무실을 떠났다. 이후 군 복무를 하면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인사처 앞 벤치를 지나갔지만 단 한 번도 그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와 이야기 나눈 순간은 2년간의 군생활에 비하면 짧디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전역을 한 이후에도, 그리고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를 기억한다. 누군가 나에게 대학입시나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풀내음 가득했던 그 벤치 앞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와 그의 아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기를. 그리고 훗날 내가 아버지가 되어도 이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