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삶이 버거울 때면 그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을 때가 있다.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상황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까. 내 감정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홀로 던지는 질문들은 삶의 무게를 줄이기는커녕 더 늘려버리곤 한다. 대학 시절 들었던 한 강의에서 교수는 인간은 외부로부터 강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 원인을 가까운 곳이나 자기 자신에게 돌려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모를 때 그 모호함을 없애기 위해서, 혹은 진짜 원인을 알면서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했다.
교수는 늦은 밤 봉변을 당한 자식을 위로하기보다는 밤늦게 다닌 행동을 나무라는 부모를 예시로 들었다. 자식의 잘못이 아닌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불행의 원인을 찾고 싶은 마음에 눈에 보이는 자식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도 비슷한 현상일 것이다. 오래전 멀어진 옛 친구는 이런 감정을 '자기 침식'이라고 말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당사자에게 말하기도 어렵고, 제삼자에게 말해도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에 혼자 고민하다 보면 자기 자신이 깎여나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모호한 불안을 없애기 위해 확실한 불행을 택하는 방식이다.
불현듯 자기 침식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면 약속을 잡는다. 대학생 때부터 10년이 넘도록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친구가 있다. 그 친구라면 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 동성 친구에게도 말하기 부끄러운 여자 이야기, 가족에게 말하기 힘들었던 서울살이,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었던 나의 모습들까지도. 그 친구를 신뢰하는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먼저 옳고 그름이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의 기준이 모호하지가 않다. 두 번째로는 무조건적인 내 편이 아니다. 내가 나쁜 말, 나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을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줄 친구다. 세 번째로는 공감 능력이 있다. 내가 밑그림만 그려줘도 다음에 내가 무슨 색을 칠할 것인지를 알고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에너지를 써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와 이야기하면 나는 내 감정에 확신을 하게 된다.
그건 네가 당연히 화낼만한 일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 더 이상 나의 예민함을 고민하지 않게 된다. 그건 지금은 기분 나쁠 수 있지만, 시간 지나면 결국 별것 아닌 것으로 지나갈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녀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정말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진짜 난감하네. 그래도 네가 잘할 수 있을 거야. 일이 잘 풀리면 다시 알려줘. 이 한마디면 눈앞의 막막함도 결국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그것은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또 의존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녀와의 대화가 끝나면 나는 문제가 아니라 해결에 집중을 할 수 있다. 그녀가 나에게 준 것은 단순한 응원이 아닌 구체적이고 검증된 신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주는 신뢰와 인정이 마음의 미세먼지를 가라앉게 만든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기에 그 사람이 인정한 나도 좋은 사람일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불현듯 나는 그녀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이 정도의 신뢰와 인정을 보여준 적이 있었나 반성하게 된다. 나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만을 생각하고 이야기할 뿐, 타인의 일상을 위해,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노력한 기억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다시 아침 해가 밝아온다. 어제 받은 응원과 신뢰를 빈 속에 채워놓고 집을 나선다. 어제의 나처럼 힘들어하는 그 누군가에게 오늘은 내가 응원과 신뢰를 전해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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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4일 처음 쓰다.
2023년 6월 15일 고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