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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도레미… 실존?

by 현묵 Mar 07. 2025

처음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손끝이 낯설었다. 검은색과 흰색 건반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풍경이 어딘가 차갑고도 부드러웠다. 어설프게 손을 올려놓기만 했을 뿐인데도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저 건반을 누르면 어떤 소리가 날까. 내가 연주하는 소리는 과연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음악 학원 앞을 지나칠 때면 종종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걸음을 늦춘 적이 많았다. 둥근 창 너머로 아이들이 능숙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은 마치 마법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듣는 사람으로만 남아 있었다. 피아노는 늘 ‘배우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배우지 못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배우고 싶다면, 지금 시작하면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피아노 학원의 문을 열었다.         

      

처음 건반을 눌렀을 때, 내 존재를 처음 자각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은 본질 없이 태어나며, 스스로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라고 말한 사르트르가 떠올랐다. 처음 눌리는 피아노 앞에서 나는 바로 그 창조의 순간을 마주했다. 건반을 두드리기 전, 나는 어떤 소리를 낼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손끝이 건반을 누르는 순간, 소리가 태어났고, 어설프게 떨리는 건반 소리는 나의 의지가 되었다. 방안에 끝없이 퍼지는 도- 가 나의 또 다른 시작의 여정을 알리는 마음만 같았다.               


손가락 번호를 외우며 연주를 반복하는 시간 속에서 깨달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에 익숙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배워 나가는 존재라는 것을. 어색한 손가락이 제멋대로 건반을 누를 때마다 나는 내 불완전함을 마주했다. 산다는 건. 불완전함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인 걸까. 서툰 연습곡이라도 하나의 멜로디가 완성될 때마다, 나는 내가 만들어내는 세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같은 부분에서 계속 실수해 속상하기도 했다. 손가락이 꼬이고, 리듬이 엉키고,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 나는 그저 똑딱이는 메트로놈의 숫자를 낮춰나가며 더 느리게 내 손가락을 짚어 건반을 눌러 나아갔다. 그렇게 눌러대다 보면 어느새 음을 기억하고 나의 음악이 된다. 어떻게 건반을 치는지를 결정하는 건 내 인생에서 사소한 선택이지만, 중요한 건 실수 자체가 아니라, 실수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나에게 실수란 조금 더 천천히 되짚으며 가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뇌며 건반 위에서 느릿하게 손을 움직인다.               


삶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악보 없이 연주해야 한다. 처음엔 어렵고, 어색하고, 실수투성이지만, 계속 살아내다 보면, 삶이 익숙해지는 때가 온다. 때로는 속도를 늦추고, 종종 박자를 놓치더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끝까지 연주하는 것이라는 걸. 그렇게 배워가고 있다.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기 전이면, 손 끝에서 어떤 소리들이 흘러나올지 설렌다. 대개는 서툴고 엉성한 멜로디일지라도, 내겐 충분히 그 자체로 의미 있다. 이렇게 눌러내듯 살다 보면, 언젠가 내 손끝에서 부드럽고 깊이 있는 선율이 흘러나오는 날이 오겠지.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조심스럽게 첫 음을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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