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 않은 그 기분
책을 기획하고 원고를 작성하며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처음 열었다.
프로그램을 열고 그 화면 앞에서 나는 오래전 글을 처음 쓸 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새롭게 열리는 백지를 보니 기분이 낯설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 처음 브런치에 글 쓸 때의 상황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그때는 글을 쓸 때 ‘이걸 써도 되나?’, ‘이런 말이 책 한 장에 어울리긴 할까?’ 생각만 많고 손은 느렸고, 마침표 하나에도 오래 망설였다.
이번에도 도구가 달랐을 뿐, 인디자인 앞에서 나는 다시 처음 글을 쓰던 나로 돌아가 있었다. 다행히 나는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은 성장했다. 디자인은 생각보다 훨씬 더 글 가까이에 있었다. ‘줄 간격은 이 정도면 될까?’, ‘이 하얀 여백은 쉼표 같을까, 그냥 공백일까?’ 나는 책을 읽는 누군가의 눈과 손이 어디쯤에서 한 번쯤 멈추길 바라며, 또박또박 여백을 배치했다. 어디에 그림을 넣을까 고민하다가, 이 글에선 굳이 안 넣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사진 한 장을 옮기다 보니 “이런 감정에는 이 사진보다 저 사진이 더 가까운 것 같아” 하는 생각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디자인은 시끄럽지 않게, 그림자처럼 책의 리듬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건 글이 아니라 ‘기분’에 가까웠다.
어떤 날은 색을 고르다 하루가 가고, 한 단락을 넘기지 못한 채 인쇄용지 사이를 헤맸다. 마우스를 누른 손끝은 어느새 뻐근했고, 책 속 고양이들보다 내가 더 많은 시간을 구겨진 자세로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참 이상했다. 글을 쓰던 때처럼, 익숙한 기분 속에서 손이 움직였다. 조금씩, 정말 조금씩 나와 내가 만든 이야기가 선을 갖추고 모양을 갖춰가는 걸 보면서 다시 한번, 책이란 건 쓰는 일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저 간단한 제목을 넣는 데 만도 고려해야 할 디자인 요소만 해도 서체, 글자 크기, 여백 간격, 배치 의도이다.
그래서 내게 디자인이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닿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었다. ‘여기, 진심이 잘 담겨 있나?’, ‘이 흐름은 읽는 사람에게 잘 닿을까?’처럼 말이다. 그런 질문에 다시 글을 고치기도 했고, 사진을 바꾸기도 했다. 마감을 하고 인쇄 주문을 할 때 까지도 계속 됐던 이런 고민은 디자인이 아니라 마음의 망설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망설임 위에 여백을 한 줄, 그림을 한 장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고민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내 글과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됐다. 독립 출판을 처음 구상할 때, 나는 글만 있으니 책은 거의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글이 있다는 건, 책이라는 세계의 절반만 가진 것이었다. 디자인이라는 낯선 세계 앞에서 나는 그 절반의 빈칸을 다시 나만의 속도로 채워나가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 빈칸이 하나의 책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