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
화면에 내가 쓴 문장을 처음 배치했을 때의 여운이 아직 남았다. 그동안 익숙하게 써왔던 문장들이 편집 화면 안에서는 마치 짐짝처럼 놓였다. 오른쪽 모니터의 열어놓은 한글 문서에는 아직 원고가 써지다 만 채 있었고, 인디자인에는 어떻게 글을 적을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사실상 나는 책을 만들기로 하고선, 기획과 편집과 원고 작성을 동시에 진행한 셈이다. 그때가 인쇄 발주까지 채 2주가 남은 시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욱 재밌었다.
하루에 충실했다 생각할 때는 안 보이던 미숙함과 하루하루 빠르게 다가오는 마감기한에 심장이 짜릿했다(?) 직장에서 이런 일이 닥쳤더라면, 그저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해결 방정식을 대입해서 성공시켰을 뿐일 거다. 책을 완성한 지금에서 되돌아보면, 쓰여만 있던 내 글을 읽히도록 하는 일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새삼 느꼈다.
무언갈 더 알고 싶어 하는 건 사랑일 텐데
어떤 게 좋은 책일지 고민하는 건 참 좋다.
그리고 글 쓰는 걸 여전히 사랑하는구나.
계속 글을 쓰게 해주는 사람과 추억에 또 고마웠다.
그런 생각이 들 무렵에
내 안의 ‘읽는 사람’이 깨어났다.
알을 깨고 새가 나오듯 말이다.
아직은 없는 글 너머의 독자가 궁금해졌다.
“이 문장을 읽고 어느 순간 숨을 고를까?”
“이행 사이로 빈 공간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마치 알림음으로 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작업한 내용을 모두 지웠다.
등장인물이 아닌 내가 쓴 글
주제에 맞지 않은 내 마음과 생각
어울리지 않는 문장
글 단어 사진 일러스트
모두 다.
그러자 책을 만들면서 지켜야 할 주제와 원칙이 너무나 선명해졌다.
쓰는 사람인 동시에 읽는 사람이 됐다.
페이지 레이아웃을 바꾸며 문단을 이리저리 옮길 때마다 ‘내 글이 당신께 어떻게 읽힐까?’라는 질문으로 설렐 수 있었다.
지워낸 문단 사이로 빈 종이가 반짝였고, 그 틈새에 독자의 숨이 들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 멈추면 좋겠다.”
“이 문장은 좀 더 가볍게 읽히길.”내 안의 독자가 귓속말하듯 균형을 잡아 주었다.
지워낸 자리마다 도연의 단어를 채우고, 공백에 독자의 숨결을 남겼다.
어느새 화면 한복판에 펼쳐진 레이아웃이 읽기의 리듬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책을 만드는 건 독자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책을 만들기 전과 후의 나에게 가장 크게 의미가 달라졌다.
페이지마다 퍼지는 여운을 느끼며 나는 작가이자 첫 독자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원고가 아닌 책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내 글이 살아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순간을 맞기 위해 나는 또 한 번‘읽는 사람’의 마음으로 책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