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간 그리고 우리도 방향을 고민한다.
산에서 내려온 가는 물줄기는 모여서 굵은 물줄기가 된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흘러서 강으로 접어들고 바다로 흘러든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고 흘러간다. 어떠한 거스름이나 저항은 없다. 그저 순리대로 흘러갈 뿐이다.
그 물줄기를 거스르는 존재가 간혹 있다. 흐르는 강물을 반대 방향으로 거스르는 연어떼이다. 자신이 알에서 부화한 고향을 찾아서 바다에서 살다가 물줄기를 거슬러서 강까지 올라온다. 연어가 먼 바다에서 어떻게 찾아오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정확하다. 본능에 따라는 것이지만 자신의 의지를 담아서 힘겨운 여정을 헤쳐나간다.
그러나 무한의 의지를 갖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연어에게는 본능만 있을 뿐 인간보다 부족한 점이 있다. 바로 왜(why)에 대한 고민이 없다. 연어는 단지 본능에 충실할 뿐 내가 왜 그곳을 가야하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니 말이다.
우리들의 진지한 고민은 사춘기 시절부터 시작된다. 얼굴에 피지가 넘치면서 여드름이 생기고, 신체는 성인에 가깝게 변해간다. 이때부터 우리의 진지한 고민은 시작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고민부터 '나는 뭘해야하지'라는 장래에 대한 고민까지 말이다. 특히 불명확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다양한 시도를 하게 만들면서, 성공과 실패의 잔을 맛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비단 사춘기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 역시도 불혹의 나이가 지나면 모든 고민이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사춘기 소년 시절처럼 불안한 미래와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고민에 잠을 설치곤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민의 연속은 자기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단지 자연의 섭리처럼 가만히 흘러가는 물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의심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도 기존의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접근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니체는 계속해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의문부호를 남긴다. 특히 니체는 무기력하고 방향성 없이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서 '왜(why)'를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고민의 시작은 '왜'에서 시작되며, 이것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발화점이기 때문이다.
공간(空間)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왜(why)'라는 고민에서 시작해야 한다. 근본적인 고민없이 단기적 사고로 만들어진 공간은 모래 위의 성처럼 쉽게 무너지기 쉽다.
내가 처음으로 준비해서 만들어간 공간은 롯데백화점에서 야심차게 진행한 미니백화점인 <엘큐브 이대>매장이다. 대규모 유통시설을 확대하기에는 제약이 크기에, 골목상권으로 침투하는 방식으로 미니백화점 전략을 펼치게 되었다. 더군다나 한때 보세 매장의 인기로 전성기를 누렸던 이대 정문앞 상권에서 말이다.
8층 규모의 상가 건물에서 가장 메인 층인 1층과 2층을 임대로 해서 외부는 물론 내부를 모두 리뉴얼 했다. 당연히 수십억원의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엘큐브 이대 매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대 상권에 찾는 중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으나, 2016년 사드 사태(사드 미사일 배치에 따른 중국의 보복조치)로 인하여 중국 고객의 발길은 끊어졌다. 결국 억지로 2년 남짓을 더 버티다가 불어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을 털고 나와야 했다.
아쉽지만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공간에 대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공간을 만듦에 있어서 그 공간이 갖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엘큐브 이대는 단지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기에 매출이 나오겠지 하는 결과물만 쫓았다. 그렇기에 내실이 부족한 공간은 그 근간이 흔들리자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반면에 내가 두번째로 기획부터 참여한 공간은 <성수동 공간(가칭)>이다. 나는 야심차게 오프라인 공간을 준비중인 온라인 플랫폼 기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오프라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이직을 하였다. 처음에는 오프라인 공간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 화려한 국내외 사례를 긁어 모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왜(why) 오프라인 공간을 만들려고 하지?'에서 시작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엉켜있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보통의 공간은 ‘무엇(what)’을 채울지에 집중한다. 백화점의 공간을 MD(브랜드 입퇴점을 통해서 변화를 줌)시에도 고객들이 좋아하는 브랜드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무엇’에 집중하게 되면 유행에 따라서 브랜드의 매력도가 저하될 때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왜’에 집중을 하면 공간의 본질에서 시작한다. 왜 만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부터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공간의 잠재적 매력은 ‘무엇’에 집중한 공간과는 엄연히 다르다.
<성수동 공간>은 온라인 플랫폼이 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렸다. 단순히 온라인의 제품을 경험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하기를 원했다. 제품을 경험함으로서 브랜드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물론 생산자로서의 도전의 기회를 보여주길 바랬다. ‘나도 이런 제품 한번 만들어 볼까’라는 고민에서 실행하는 플레이어로서의 가능성을 만드는 공간을 바랬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을 담은 공간을 위해서는 최소 2개 층 이상의 공간이 필요했다.
우리들 고민과 탐구의 종착지는 결국에는 본질이라는 존재에 있는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껍데기를 걷어내면 알맹이가 남는다. 그러나 그 알맹이가 갖고 있는 의미는 명확하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심을 통한 본질이 갖는 가치일 것이다.
공간 역시도 ‘왜’라는 고민에서 시작해서 본질적 정의를 세워야 한다. 단단한 대지 위에 세워진 건물은 주변의 변화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공간의 본질적 가치를 통하여 땅을 다져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공간을 세우고 채워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