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과 아름다움의 시그널
새벽 공기를 가르던 싸리비 소리를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매일 같은 시간에 마당을 쓰셨다. 어젯밤 바람이 흐트러뜨린 낙엽과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발자국들이 빗질 몇 번에 정갈한 결을 이뤘다. 그 흙마당이 유독 예뻤던 것은 좌우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기하학적 대칭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질서했던 공간이 누군가의 정성으로 인해 '정리'되었다는 안도감, 즉 형태적 안녕의 신호였다.
물리학자 에미 노터(Emmy Noether )는 '모든 대칭성에는 그에 대응하는 보존 법칙이 존재한다'[1]는 사실을 증명했다. 시간의 대칭이 에너지를 보존하고 공간의 대칭이 운동량을 보존하듯, 형태에서의 대칭은 그 구조가 외부의 충격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간직하고 있음을 뜻한다. 할아버지가 매일 새벽 마당을 쓰는 행위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삶의 질서를 보존하려는 일종의 '형태적 보존 법칙'의 수행이었던 셈이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대칭은 건강함의 지표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생명은 결코 완벽한 대칭 안에 갇혀 있지 않다. 학계에서 '변동 비대칭(Fluctuating Asymmetry)'[2]이라 부르는 미세한 어긋남은, 역설적으로 그 개체가 환경과 치열하게 상호작용하며 살아낸 '생의 흔적'이다.
이 어긋남을 불안정이나 결함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만한 시선일지 모른다. 형태 철학의 눈으로 보면, 비대칭은 틀린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속도로 빚어낸 고유한 질서다.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게를 맞추려 애쓰고 무너진 일상의 균형을 잡기 위해 '날을 잡아' 정리를 하는 이유는, 완벽한 대칭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비대칭한 채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나라는 존재의 '심리적 중심'을 회복하여, 삶의 붕괴를 막으려는 본능적 방어 기제인 것이다.
수학에서 대칭은 어떤 변환을 가해도 변하지 않는 속성을 연구하는 '군론'으로 다뤄진다. 정리는 무작위적인 상태를 특정한 질서의 체계 속으로 편입시키는 지적 설계다. 이 정돈된 상태에서 비로소 인간의 뇌는 정보를 최소 비용으로 처리하는 인지적 경제성을 획득하며, 이는 곧 게슈탈트의 통합 원리로 이어지는 문이 된다.
'빗질이 남긴 흔적들이 개별적인 선이 아닌 하나의 마당으로 읽히는 순간, 우리의 인식은 이미 부분의 합을 넘어선 전체의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3] 때로는 스스로 정리할 힘이 없어 남의 손을 빌리기도 한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형태를 복원하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다. 할아버지의 싸리비가 머물다 간 자리마다 아침이 새롭게 맞이되듯, 우리 삶의 흙마당에도 매일의 정리가 필요하다. 그 정돈된 결 위에 비로소 각자의 어긋남마저 조화로운 '나'라는 꼴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우리 생활 속 대칭의 질서와 그 붕괴의 사례를 연재합니다.
[11장. 샤넬]: 0.1mm의 허용 오차로 세운 대칭의 정직함. 설계자의 집요함이 어떻게 사용자의 망막에 안도감을 선사하는지, 그 공학적 배려를 기록합니다.
[12장. 에그체어]: 인간의 곡률을 닮은 비대칭 속의 대칭. 아르네 야콥센이 구현한 '포용하는 꼴'이 우리 몸의 무게 중심을 어떻게 회복시키는지 살펴봅니다.
[13장. 광학적 독재]: 전·후면을 가로지르는 LED 라인의 '시각적 월권'. 대칭이라는 명분 아래 망막을 직접 타격하는 강렬한 광원들이 어떻게 사물과 인간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파괴하고 인지적 폭력을 행사하는지 고발합니다.
[1] 'Noether’s Theorem: 물리계의 대칭성과 보존 법칙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설명하는 정리로, 현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룬다.
[2] 변동 비대칭(FA): 완벽한 대칭에서 벗어난 미세한 편차를 의미하며, 생물학에서는 이를 개체의 발달적 독특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3] 게슈탈트 심리학: 좋은 형태의 법칙(Law of Prägnanz)은 인지 과정이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최대한의 질서를 구현하려는 경향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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