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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친정엄마가 불편해서

K장녀의 면역치료

엄마의 육아 일기는 두 장에서 끝난다.


아기가 태어났다. 돌림자가 '물'이라 해서 우리는 각자 이름을 생각했는데, 그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풀'이 어떠냐고 했다. 나도 같은 이름을 생각했는데, 이렇게 운명적이라니.

라는 내용 하나.


물풀은 너무 예쁜데, 기분이 이상하다.

는 문장 뒤에는 여백만 가득하다. 누렇게 바랜 스프링 노트는 아기였던 나의 필체(낙서)로 드문드문 채워져 있다.


뭘 쌌던 건진 모르겠지만, 오래전 명절 선물을 포장했던 보자기 속에 그런 게 들어있었다. 공장에서 찍어낸 황금색 천은 거친 헝겊에 가까웠지만, 반짝임만은 여전했다. 엄마는 너무 많이 들어 이젠 신화처럼 새겨진 그 이야기를 두서없이 보자기와 함께 풀어놨다. 출산한 지 일 년이 채 안 된 어느 날이었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나 고등학교 때 갑자기 연달아 돌아가셨어. 엄마,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그렁그렁)

다행히 상업고등학교에 다녀서 은행에 들어갔지. 그때는 은행이 최고였어. 월급 따박따박 나오지, 번듯한 이름 걸고 다닐 수 있지. 충무로 지점에서 아빠를 처음 만났어.

자기야, 그때 알았다니까. 정산하려고 돈 세는데 뒤에서 자기가 날 계속 쳐다보는 거 말이야.
(호호호)

네 아빠도 부잣집 막내 도련님으로 잘살다가 사업 망하고, 식구들 다 미국으로 이민 가버리고. 혼자 남아서 은행 들어온 거라, 둘 다 외로웠지 뭐. 아무튼 아기 낳기 바로 전날까지 일했다니까. 그때만 해도 임신하면 회사는 무조건 그만둬야 했는데, 그래도 은행이니까 배불러서도 다니고 그랬지.

출산 휴가 쓰고 들어간 딱 그다음 날 네가 태어났어.

어머 얘, 그 병원 아직도 있는 거 아니? ㅇㅇ산부인과, 알지? 가락동 시영아파트 5층. 네가 3살 때까지 거기서 연탄 떼면서 살았다니까.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배달 추가 요금도 냈었어.

암튼 신기해. 그때만 해도 산후우울증 이런 게 다 뭐니. 너무 힘들어서 소아과 접종 가서 물어봤는데 별 얘기 없더라고. 너무 답답해서 너 낳았던 산부인과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봤지. 아기 낳고 나면 그럴 수 있다고 그러더라고.


보자기 속에는 수집한 폐품처럼 보이는 종이들이 일관성 없이 쌓여있었다. 아기수첩부터 시작해 국민학교 이름과 반이 적힌 일기장, 받으려고 왜 그렇게 기를 썼나 싶은 개근상과 표창장, 특출나진 않지만 성실히 공부했음을 격려하는 상장, 취업 준비하며 열과 성을 다했던 공모전 수상장 몇 개가 코팅되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올 수 있다(안나 아흐마토바, 『태양에 대한 기억이』 중 <자살하고픈 슬픔> 중)’는 말은 누구의 삶에 들어서도 어울릴 테지만, 내 겨울은 엄마가 그 일기장을 건네줬을 때 시작됐다. 가족들 사이에 감도는 희미한 냉감은 늘 있었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들 사는 집이라면 다 그런 거라 생각했다.


피곤해 죽겠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가지고 와.
몇 장 쓰지도 않은 옛날 육아일기 따위를 왜 나한테 갖다주냐고.  


일기장은 불시에 모든 걸 얼어붙였다.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Let it go'를 시원하게 외쳐주는 엘사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갑자기 툭 튀어나오기 있음?! 형체도 흔적도 없어 더 무시무시한, 사 람마다 저-기- 밑바닥에 하나쯤 품고 산다는, 잘못 건드리면 훅간다는 바로 그 존재, 내면 아이였다그땐 'inner child' 같은 심리학 용어는 알지 못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숨죽이고 있던 마그마가 아무도 모르게 솟아오르듯이, 속 어딘가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겨울이 와 있었다.

눈 덮인 한라산


신체적으로도 멀쩡하진 않았다. 아이가 두 돌 무렵이었다. 원래 건성이라 무의식 중에 팔이나 허벅지 같은 데를 긁긴 했지만,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긁어도 시원하기는커녕 손이 닿을 수 없는 피하지방 아래까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더 박박 긁었다. 긁다 보면 빨갛던 피부가 숲 모기에 물린 것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물집처럼 큰 두드러기가 여기저기 올라왔다. 알로에 크림이나 연고를 바르면 조금 가라앉아서 일시적인 현상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반년 정도, 밤만 되면 두드러기가 여기저기 올라왔다. 왼쪽 팔에서 올라와 벅벅 긁다가 연고를 바르면 사라졌지만, 몇 분 뒤에는 오른쪽 허벅지에 다시 올라오는 식이었다. 병원에 가도 항히스타민제와 약한 스테로이드 연고만 처방받았을 뿐, 원인을 밝혀내진 못했다. 피부 밑에 불룩한 괴생명체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 같았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환경 변화였다. 제주의 자연에는 육지와 다른 물질이 워낙 많아 원인을 밝히기 힘든 아토피가 가장 많이 생기는 지역이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계란과 우유 알레르기가 있어서 서울에 있는 유명하다는 병원에 다닐 때 알게 된 사실이다.


두 번째로 유력한 가설은 알코올 과다 섭취다. 가정보육+주 5일 독박 육아가 기약 없이 이어지던 때였다. 매일 밤 시커먼 어둠이 뒤덮인 창밖의 귤밭을 바라보며 영양제처럼 술을 마셨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당연히 간지러움은 심해졌지만, 그땐 술이 최고였다(기댈 곳이 이것뿐이었단 얄팍한 핑계는 대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긁다가, 항히스타민제를 먹은 뒤 연고를 바르면 잠들 수 있었다.




엄마를 향한 원망과 '엄마가 하는 말과 행동은 뭐든 마음에 안 듦'의 상태가 마그마처럼 터져 나온 것도 이때와 시기가 겹친다.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방법은 원인이 되는 물질(=알레르겐)을 피해 증상을 완화시키는 게 첫 번째다. 하지만 일시적인 방법일 뿐, 근본적인 치료는 따로 있는데 조금 도전적이다. 알레르겐을 조금씩 투여해 몸이 내성을 키워 적응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걸 면역치료라고 한다.


아기를 낳고 키우며 나는 '엄마'라는 단어만 마주해도 두 드러기가 돋은 것처럼 신경 여기저기를 긁었다. 아이에게 원치 않게 화내고 소리 지르는 것, 아이가 기질적으로 불안을 많이 가지고 태어난 것, 동시에 나의 불안도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는 것, 남편과 싸울 때 한 없이 우울해지는 것 등등, 별 게 다 엄마 때문인 것 같았다. 감정을 억누르고 잘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결국 내 가정생활을 이토록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두 살 터울 남동생이 칠삭둥이로 태어난 뒤로 나는 하루아침에 '공주님'에서 (동생을 멀쩡하게 키우기 위한) '보조자'로 역할이 변경됐다. '애어른' 소리를 들으면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투정은 사치였고, 눈치는 필수 장비였으며, 동생을 잘 돌보고 스스로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게 사랑받는 방법이었다. 그것 말곤 방법이 없어서 그랬다. 이런 케이스, 우리나라엔 너무 많아서 크게 억울하진 않다. 


정말 슬픈 건 마흔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난 '효도'와 '동생 돌봄'이 정교하게 코딩된 채 살고 있다는 거다. 취업을 하자마자 아빠는 내 급여 통장에서 동생 청약 통장으로 자동이체를 신청했고, 스물다섯에 결혼을 준비할 때엔 살림 준비에 필요한 게 있는지 내게 묻지도 않았다(손 벌릴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물어는 봐주실 줄 알았지 뭐야). 결혼 후에는 남동생 학원비와 용돈까지 챙겨주기도 했는데(누가 시킨 적 없다는 게 포인트), 정작 엄마는 추석 때 동생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전화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동안 우리(남편과 나)가 동생에게 대준 금전적 지원과 상품권 같은 건 다 뭐냐고, 추석 때 동생 챙기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고, 맞붙어 소리도 질렀다.


"그깟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그래! 추석에 맞춰서 선물을 해야지!"


착하디 착한 남편이 우리 집 식구들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도 그 소리를 듣고나서부터였을 거다. 십 년 넘게 우리가 크게 싸우는 이유는 풀리지 않는 우리집 부모님의 태도에서 시작한다. 우리집 식구들이 내게 준 염증은 자연스럽고 빠르게 남편에게로 전이됐다.




사는 내내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지닌 채 살아가는 건 쓰리다. 남들처럼 친정엄마가 안쓰럽다거나 존경스럽다는 마음을 가지진 못할 망정. 감히 'K장녀'로서 얼토당토않다.


장황하게 풀어놓은 이유를 종합해 볼 때 이대로 살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집착할 사안이라면, 정면 돌파해 보는 게 맞았다. 그렇게 거친 황금빛 보자기에 싸여 있던 어릴 적 일기장을 5년 만에 다시 펼쳤다. 손이 떨리는 것처럼 마음이 떨렸다.


엄마를 미워하지 않기 위한 면역치료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가장 어려운 일이 남아있었다. 여태 나는 듬직한 큰딸로 살아내느라 이를 악물고 있었다고. 혼자서 꽝꽝 얼어붙은 강을 넘어지지 않고 건너야 엄마가 정해준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고. 칠삭둥이 동생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작 세 살 때부터 엄마의 죄책감을 함께 뒤집어쓴 채 살고 있었다고. 몇 달에 걸쳐, 몇 번의 전화 통화를 하며 토하듯 이야기를 뱉어냈다.


어느 겨울, 고립된 중산간 마을에서


전화를 끊고 폭포 같은 눈물도 멈춘 뒤 생각해 보았다. 훗날 내 아이가 자라 나에게 저런 말을 쏟아내면 어떤 기분일까? 딴에는 최선을 다했는데, 사라져 가는 나 대신 너를 키워냈는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마흔이 다 된 자식을 마주하면 무슨 생각이 들까? 평생 경험해 본 적 없는 우울과 공포가 찾아올까?


여전히 성실하게  K장녀다운 생각이 들어 불편하지만, 애써 괜찮다는 말로 나를 진정시킨다. 내 아이가 나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보단 실컷 토해내고 편해지길 바랄 것임은 분명하다. 이제라도 훨훨 둥지를 날아가 잘살라고 진심으로 바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지 않는 비릿한 죄책감의 냄새를 맡고 살던 어느 날, 프랑스 문학의 대가인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를 접했다. 지극히 사실적인 자전적 소설의 내용이 작가의 어머니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란 질문에 대한 답이었고, 그 부분에 밑줄을 긋고 또 그었다. 


"사실 나는 내가 데뷔작인 <빈 장롱>으로 이미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인정해요. 그러나 다시 해야 한다면 나는 또 그렇게 할 겁니다."

-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 인터뷰 중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윤혜정


비린내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이대로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했다.


P.S. 두드러기는 어느 날 사라졌다. 술에 대한 의존과 사랑은 더더욱 깊어져만 갔고, 먹기 행위의 중요성을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나는 제주에 온 지 6년 동안 몸무게가 15kg이나 늘었다.



물풀의 두 번째 글.

(본문에 등장하는 이름은 필명인 '물풀'로 대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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