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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망고빙수

소원이 이루어지는 마법

셋째 삼촌은 내가 7살이 될 때까지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다. 해외출장을 자주 다녔는데 실제로 날아다니는 새(과연? 어쨌든 기억은 그렇다), 춤추는 고릴라 같이 친구들한테는 없는 장난감도 사다 주고 신기한 물건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삼촌의 방에는 곰, 사자, 얼룩말, 배, 대포 그리고 미니 술병 등 크기만 비슷하고 일관성 없는 모형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삼촌이 집에 없을 때면 그 손가락만 한 플라스틱 모델들을 죄다 꺼내 장난감 삼아 놀기도 하고 현지 아이들과 찍은 사진이 든 앨범을 들춰 보며 바깥세상은 어떨까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해외 펜팔이 유행이었다. 내 신상과 함께 희망하는 나라를 적어 우체국 발행 현금 영수증을 함께 보내면, 몇 주 후 명함 크기의 얇은 종이 한 장이 우편함으로 날아왔다. 만국기 그림으로 테두리를 두른 노란 종이에는 나와 연결된 친구의 국적기 그림과 타자기로 찍은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해외 펜팔’이라는 제목의 연두색 책이 너덜거리도록 뒤지고 뒤져 말을 만들고, 자꾸만 고쳐 쓴 지저분한 흔적을 숨기려 편지지를 새로 바꾸고 또 바꾸다 보면 버리는 종이가 수북해 지곤 했다. 어렵게 만들어진 말과 껌이며 코팅한 네 잎 클로버 같은 납작한 물건들을 편지봉투 안에 평평하게 눌러 넣었다. 왼쪽 하단에 ‘VIA AIRMAIL’이 적힌 빨강과 파랑 빗살 무늬 테두리의 봉투에 마지막으로 나를 담으면 우표 한 장에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태국으로, 다음엔 싱가포르, 필리핀, 캐나다, 스웨덴, 프랑스, 이집트까지 갈 생각에 들떴다.


우체국에 가는 길과 우편함을 여는 일이 세상 가장 설레었던 그때부터 나의 시선은 항상 멀리 바다 밖 세상을 향했다. 대학교 휴학 후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나서야 처음으로 바다를 건널 때도, 회사를 다니며 출장을 다닐 때도, 휴가를 내고 여행을 다녀올 때도 가급적 더 멀리 까치발 딛고 담장 밖을 기웃거리기 바빴다.  



 

제주도 어느 시골 마을 풍경
제주도? 뭐 볼 게 있나. 촌스러워.

결혼식과 동시에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동생이 제주도에 가자고 했다. 내가 멀리 떠나기 전에 가족과 특별한 추억을 만들자며 제주도 패키지여행을 준비한 것이다. 

제주도? 부모님 세대가 결혼할 무렵에나 유행했던 신혼여행지 아닌가. 뭐 볼 게 있나. 유채꽃. 돌하르방. 한라산. 그게 끝. 촌스러워. 서른 살이 되도록 단 한 번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제주라는 섬은 내 호기심이 미치기에 너무나 가까운 곳이었으니까. 


부모님이 더 이상 여행을 갈 때 다 자란 세 딸을 데리고 다니지 않게 된 이후로, 성인이 된 딸들은 각자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어서 우리로서는 꽤 큰 프로젝트였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비행기도 함께 타보고 뚜벅이였던 우리 가족을 어디든 데려가 주는 패키지여행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제주도가 어떻건 이 정도면 딱 좋았다. 

 

절대 상술에 안 넘어간다며! 그래서 옵션도 싹 다 뺀 거잖아요. 근데 제주에서 상황버섯은 웬 말이고 마유크림은 또 왜 이리 많이 사냐고요? 엄마는 원래 그렇다 쳐도 아빠까지 왜 이렇게 진지한 건데?

 

한 시간 넘게 갇혀 있던 상점마다 마법의 가루를 마신 냥 동공이 풀려 고개를 끄덕이는 부모님의 얼굴. 쓸데없는 돈은 쓰지 않겠다고 단단히 무장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자동반사로 지갑을 여는 손. 그걸 어리둥절 안타깝게 지켜보는 갈 곳 잃은 나의 눈동자. 난생처음 경험한 패키지여행의 시트콤 같은 상황에 배꼽 움켜쥐고 웃다가도 헤어질 아쉬움에 이내 코 끝이 시큰해지곤 했다.

 

마지막 밤, 단체여행 숙소의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쳤지만 회 한 접시 먹어보지 못하고 떠나기 아쉬운 일행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탈출을 감행했다. 택시 기사님을 믿고 도민 맛집을 안내받아 식당 안에 입성했지만 관광객 전용 메뉴판을 받아 들고 분노한 아빠를 따라 테이블에 놓인 숟가락을 두고 나와야 했다. 인간 내비게이션인 아빠는 새카만 제주 밤을 걸어 기어코 동네 사람만 올 법한 횟집을 찾아냈다. 정말로 회 한 접시만 먹고 일어선 우리는 택시가 잡히지 않아 또다시 걸어야 했다. 참고로 거기에서도 회는 맛이 없었다. 아빠는 지금까지도 제주도 회는 비싸고 맛없다고 말씀하신다.

 

옵션 신청을 하나도 하지 않은 우리는 자유시간이 남아돌았다. 오로지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카페만 보이면 제주에 왔으니 망고빙수 한 번 먹어보자고 노래를 불렀지만 번번이 패스.

 

애가 소원 이래잖아요. 이제 가면 또 언제 본다고…

 

엄마의 원망 섞인 넋두리에 아빠도 마지막 날에는 넘어가 주셨다. 그 당시에도 제주산 망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한 가격에 놀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호텔 로비에서 망고빙수 한 그릇에 다섯 개의 숟가락을 꼽는 진상을 부리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안 그러면 아빠가 이 비싸기만 하고 별 맛도 아닌 걸 왜 돈 주고 사 먹냐고 그냥 나가 버릴까 봐. 다행히 제주에서 처음 맛본 망고빙수는 꽤 괜찮았다. 마지못해 빙수 한 스푼 입에 넣은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나의 관심사는 런던에서의 새 삶과 남겨두고 떠나는 가족이었다. 제주도라는 장소성보다는 내 개인의 사정과 오랜만에 온 가족이 붙어 지내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더 기억에 남는 추억 정도였다. 첫 제주 방문의 엉뚱하지만 아련했던 기억은 더 먼 곳으로 떠날 설렘에 묻혀 ‘내가 이곳에 또다시 오게 될까’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것 같다. 독불장군 아빠가 떠나는 딸내미에게 마지막으로 들어준 소원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줄 거라고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이 낯설고 부당한 기분이야

가족 송별회 장소였던 제주도 여행 12년 후.


나는 다시 서울에 살고 있었고, 여전히 런던을 그리워하고 있었고, 또다시 런던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를 볼모로 서울로 강제 송환될 때 내 팔과 다리는 잘린 것과 다름없었다. 다리를 얻기 위해 우슬라에게 목소리를 빼앗기고 노랫소리로 자신을 기억하는 왕자의 키스를 받아야 하는 인어공주 신세 같았다.

당연한데 당연하지 않은 하루하루가 거북했던 서울살이는 가족과 친구가 있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팔다리 잘려 구덩이에 빠진 나를 꺼내 주지는 못했다. 그 안에서 버티도록 간혹 물과 식량을 떨어뜨려 줄 뿐이었다. 스스로 기어 나오지 못하면서 그 양분을 받아먹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죄책감만 들었다. 어린 내 아이는커녕 나조차도 감당이 되지 않아 허우적대고 휘청거리는 시간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타향살이를 하듯 내가 태어나 자란 서울에서 겉돌고 있을 때, 런던에 다시 살러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두 번째 서울살이 6년을 버텼다.

 

오랜 기대와 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스스로 그 희망을 접었다. 코로나가 전 세계로 퍼졌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에 몇 번 가보지도 못한 아이를 데리고 사지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그 험난하다는 관문을 뚫고 들어가 숨죽여 살아낼 용기가 없었다. 서울에서의 삶 또한 숨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은 아파트에 갇혀 아이와 기약 없는 격리생활을 하는 일상은 누군가에겐 유난스러움 혹은 사치스러움이었겠지만 내겐 고문이었다. 좌절은 순식간이었다.

 

그럼 제주도 일년살기 그거 해볼까?

그때 우리 부부의 옆구리를 꾹꾹 찌른 것은 제주였다. 최악의 상황까지 갔다 왔다를 반복하다 보니 대면 대면한 사이가 된 우리 부부가 너무나 오랜만에 맞장구를 쳤다. 아이를 동생에게 맡기고 2박 3일 일정을 짰다. 제주시가 섬의 어디에 붙었는지 감도 없이 제주살이를 결심한 무모함은 3일짜리 헌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40일간의 장마가 막 끝났다던 제주는 이글거리는데도 축적된 축축함이 여전했다. 가는 집마다 쿰쿰한 곰팡이 냄새와 제습기 소리가 거슬렸다. 이틀을 우리에게 올인한 부동산 아저씨에게 미안하지만 안녕을 고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 어쩐지 망고빙수가 생각났다.
바다 보며 망고빙수 한 그릇은 먹고 가야 허탈함이 덜할 것 같았다.
12년 전 그날처럼.

해수욕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검색 앱이 알려준 목표물을 향해 걷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 ‘땅’이라고 쓰인 시뻘건 손글씨 간판이 보였다. 불 꺼진 작은 길가 상점의 말간 유리문 앞에는 핸드폰 번호가 적힌 하얀 A4용지가 아무렇게나 붙어 있었다.

 

부동산 사장님 번호겠지? 혹시 모르니 한번 걸어볼까?

 

빙수집에 자리를 잡자마자 휴대폰에 미지의 번호를 눌렀다. 약속은 바로 잡혔다.

망고빙수는 한참만에 나왔고 10분 안에 처치해야 할 애물단지가 되었다. 남편은 몇 술 뜨지도 못하고 먼저 부동산 앞으로 뛰쳐나갔고, 나는 그냥 물리기가 아까워 몇 숟가락이라도 더 퍼 넣느라 뒤늦게 따라 나갔다. 100미터 전방 부동산 앞에는 온몸에 페인트를 뒤집어쓴 몸빼 차림의 아주머니가 남편과 나란히 서 있었다. 건너편 펜션공사를 하다 부랴부랴 나왔다는 부동산 사장님은 예산과 계약조건을 묻는 대신 우리에 대한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염색하지 않은 회색빛 커트머리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장님은 훅하고 다가와 내 어깨를 쓰담 쓰담하더니 합격을 통보했다.

 

애기 엄마 인상이 너무 좋아. 결단력도 있고. 아 진짜 맘에 든단 말이야.

 

허허허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보여주고 싶은 집이 있다며 당장 자신을 우리 차에 태우라고 했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저 낯선 이를 한 차에 태우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

 

마스크를 누르며 곤란한 눈빛을 교환했지만 사장님의 입담에 이미 반은 얼이 빠진 우리 부부는 시키는 대로 했다. 사장님은 먼저 금능해변 앞에 차를 멈추게 했다. 차에서 잠시 내려 현지인의 안내 멘트가 포함된 감상 시간을 가진 후 구불구불 시골길을 좌로 우로 계속 꺾었다. ‘길 없음’ 표지판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드디어 덩그러니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 곳에 차를 멈췄다. 나무 둘레에는 그네와 자전거 그리고 소꿉놀이가 널브러져 있었고, 똑같은 모양의 하얀 집 여러 채가 아담한 잔디 놀이터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장님은 그중 한 집으로 걸어가더니 내 집처럼 번호키를 누르고 들어가 또 내 집처럼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주었다. 쭈뼛쭈뼛 받아 든 하드바를 차마 입에 넣지는 못하고 모락모락 피는 찬 김에 땀을 식히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살림살이가 그대로 남겨진 집안 공기는 주인 없는 남의 집인데도 신기하리만큼 따스하고 뽀송뽀송했다. 어느새 내 손에는 끈적이는 에메랄드빛 액체가 묻어 있는 나무막대 하나만 들려 있었다. 


'바로 이 집이다!’ 속으로 외치며 남편과 다시 한번 눈을 마주쳤다. 실로 오랜만의 합의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장님은 집주인을 설득해 매매로 내놓은 집을 연세로 돌렸고, 육지로 긴급 발령 난 집주인 대신 당신이 대리 계약서를 작성했다. 스피커폰으로 내용을 녹취하자 계약이 완료됐다. 얼떨떨하면서도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데 사장님이 돌담 너머로 겸연쩍게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가 우리 집이야

 

그렇게 부동산 사장님은 우리 이웃집 할머니가 되었다.

 

 


 

(애절한 눈빛으로 두 손 꼭 모으고) 엄마, 꼭 잔디밭 있는 이층 집 찾아와야 해! 응~?


마땅한 집이 없어 빌라나 아파트에 타협하려는 순간마다 눈앞에 둥둥 떠다니던 딸의 얼굴. 개선장군처럼 돌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 관상 덕에 네가 원하는 집을 구했다고.


아이는 마당에만 나가면 맨발이 된다.





미오의 세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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