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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단맛

그동안 잊고 있었다

오한에 잠이 깼다.


갑상선암 수술 후 종종 바들바들 떨다가 놀라 잠에서 깨곤 한다. 삼분의 일만 남기고도 여전히 혹을 품고 있는 갑상선으로 살아내느라 티 나지 않을 수고를 하고 있는 나의 몸. 금방 지친다고, 쉬이 짜증이 난다고, 골골거린다고, 굼뜨다고, 퉁퉁 부어오른 제 몸뚱이를 한심해하던 뇌는 너무 다그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두터운 카디건에 수면양말 하나 더 꺼내 와 온몸을 웅크리고 동굴 속 겨울 곰이 되어 본다.

오들오들 바짝 힘을 주어 몸속 깊이 부싯돌을 비벼보면 희미한 열감이 등골을 타고 작은 불씨를 지피기 시작한다. 사르르 냉기가 데워지고 달그락달그락 이를 부딪히던 턱이 잠잠해진다. 이제야 옆에 자고 있던 아이가 제 이불은 걷어차고 내 이불을 돌돌 말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고요한 밤 스르륵 토닥토닥 이불을 덮어주는 모성애 가득한 따뜻한 장면은 환상이다.

퉁퉁 부은 손가락이 힘을 못 써 이불깃을 몇 번이나 놓쳤는지 모른다. ‘아이고’ 하면서 저린 손목을 턴다. 밑에 깔린 이불이 꼼짝을 않자 오만상을 찌푸리고 가장 만만한 안면근육에 힘을 모은다. ‘헙’하고 기합을 넣은 후 커다란 바위를 옮기듯 아이를 '휙' 굴리면 덮어줄 이불 획득이다. 살포시 안아 올리는 다정함을 보이기엔 아이의 무게가 한도를 초과했다. 지친 팔은 이불을 '펄럭' 내던지고 '끄응차' 슬로모션으로 아이 옆에 누워 이미 말똥 해진 눈을 감아본다.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의 손이 허벅지 밑에 깔린다. 어쩔 수 없이 거칠게 다룬 것이 살짝 미안해 손을 잡아본다. 이제는 제법 두툼하게 내 손아귀를 꽉 채우는 내 아기의 손. 야들야들 보들보들 말랑말랑. 조그맣고 연약해 지켜줘야만 할 것 같은 작은 생명체. 조심조심 감싸 쥐고 호호 불어주던 여린 손이 얼마 안 있으면 내 손을 감싸줄 만큼 커질 것 같다. 언제 이렇게 큰 걸까. 이제 제법 사람처럼 느껴진다. 괜히 눈물이 핑 돈다.


아이가 손수 만든 디저트를 손 위에 올려놓고.




딸은 사탕을 좋아한다.


비밀장소에 숨겨 놓은 사탕 한 알 몰래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게 삶의 낙인 열 살. 학교 화장실에 들어가 마스크 속에 하나 쏙 넣고 나와 태연하게 선생님 눈을 피하고, 엄마가 먼저 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카시트 아래 숨겨둔 사탕을 까먹고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집에 들어오는 용의주도함을 갖췄다. (까먹고 난 껍질까지 깔끔하게 처리하는 완벽함은 아직 구비하지 못했다.) 어쩌다 생긴 사탕 한 알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세상을 잃은 듯 아기처럼 목 놓아 울다가 결국은 찾아내 입에 넣어야만 울음을 그치는 집착도 있다. 단 것을 어떻게든 덜 먹이려는 엄마의 통제에 대한 반항의 산물일까. 아니면 태아일 때부터 과도하게 섭취한 당 수치에 반응하는 것일까. 사탕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사실 나도 단 것을 정말 좋아한다. 술도 밥도 끊어볼 결심은 할 수 있어도 달콤함은 절대 끊을 수 없을 것 같다. 시험기간에는 젤리를 종류별로 사서 책상 앞에 두어야 든든했다. 임신 중 입덧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까먹은 생강 맛 젤리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최고의 당도를 머금은 캘리포니아산 오렌지와 복숭아도 몇 상자를 비웠는지 헤아릴 수 없다. 세상이 멸망한다고 할 때 마지막으로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라면 단연코 달달하고 사르르 녹는 프랑스식 무스 케이크.

그러면서도 엄마랍시고 연신 단 것의 폐해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그러다 보면 다람쥐처럼 입 안 가득 굴리고 있는 사탕이 정말로 내 딸의 인생을 망치는 악마쯤으로 보인다. 이도 저도 안 먹힐 때 자신의 한 알을 취하기 위해 엄마에게 한 알을 희생하는 고단수의 전략으로 치고 들어와도 넘어가지 않을 만큼, 사탕이 싫어진다. 그때만큼은 하나도 먹고 싶지 않다. 그리고는 단호하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엄마는 사탕 안 좋아해




자신을 돌아보다 보면 유년시절을 찾아가게 마련인데, 나의 길은 도중에 막혀 있다. 처음 내 의지로 가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났던 그 시점, 하필이면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질 뻔한 커다란 도전에 신혼시절이 끼어들어 흐름이 막힌 나는 더 멀리 되돌아보지를 못하고 있다. 도대체 뭐였길래. 거기 멈춰서 자꾸 발만 동동거리고 있는 것일까. 왜 더 멀리 더 깊이 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많이 억울했다. 기다림이 아무리 길어져도 끝까지 나만 기다릴 거라고 해놓고,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같이 성장하는 사이가 되자고 약속해 놓고, 한 번만 양보해 주면 보상을 해주겠다, 한 번만 도와주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헛된 약속으로 탑을 쌓더니 우르르 무너뜨린 그 돌더미 안에 나를 가두고 야비하게 제 살 길 찾아 먼저 가버렸다. 울부짖고 내지르며 이 억울함을 호소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어깨를 토닥여 줄 거라 생각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은 손가락질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철들지 않은 내 어린 마음이었을 뿐. 그 누구도 굳이 아이 엄마와 아빠의 속사정을 들춰볼 이유도 필요도 없다.

마땅히 토닥임을 받을 사람은 성실하게 돈 벌어오는 사람이었다. 아이만 기를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도 길러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볼멘 목소리로 복에 겨운 소리나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철 좀 들어라.


가시 돋친 메아리가 귀에 맴돈다. 입은 점점 굳게 닫혀가고 속사정은 꾹꾹 눌러 담는다. 그렇게 봉인된 상자는 가슴속 깊은 우물 바닥 뻘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냥 그렇게 되도록 둘 수만은 없는데 아이 앞에서는 더욱 꺼내 볼 수가 없다. 내 눈에서 사라질까 불안해서 힐끔힐끔 곁눈질만 할 뿐이다.  




얘, 테레비에 취미를 붙여보렴. 다른 아줌마들처럼 드라마도 좀 보고.


쓴 맛을 곱씹기만 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선배로서의 조언을 해준다.


그렇게라도 잊으려 하면 정말 아무렇지 않게 되는 걸까?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철없음은 창피한 것이 마땅할까?
엄마의 엄마 다움을 포기해야 내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걸까?
주고 싶은 내 마음을 그대로 다 주면서 나로 사는 것은 가능하기나 할까?
젊은 날 모르던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엄마의 나이가 되면 그 덧없음을 알게 될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지만 점점 길어지는 밤이다.


땅에 떨어진 사탕을 주워 먹지 못하게 하는 엄마의 말에 세상을 잃은 듯 대성통곡하는 아이의 마음은 아무리 엄마가 설명해 줘도 위로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지금 사탕 하나에 세상을 잃은 듯 울고 있는 어린아이 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인 줄 아는 어른 아이.

그 억울함과 슬픔이 걷히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조만간 딸에게 고백을 해야겠다.

사실 엄마도 단 거 좋아해.


내 아기의 작고 연약한 손, 그 보드라운 감촉이 아직도 기억난다




미오의 네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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