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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섬 위에 불시착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놓은 것들

어쩌다 보니 여기에 내가 있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비로소 알아챈 이 막연한 느낌이 낯설지 않다.




넌 왜 자꾸 섬에서 살아

얼마 전 16년 만에 연락이 닿은 동기가 던진 말에 머리가 뎅 하고 울렸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 사이 내가 거쳤던 곳을 모르는 그 친구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이 런던이었으니까. 그때 살고 있던 곳이 섬나라 영국이었다. 그리고 내 몸은 흐르고 흘러 또다시 섬에 머물러 있다. 떠나기로 기약한 날이 한참 지났지만 아직은 더 있고 싶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고향도 아니면서 향수를 느끼는 런던을 떠난 후 처음이다. 비슷한 점도 별로 없는데, 일부러 섬을 찾아 움직인 것도 아닌데, 어쩐지 마음은 닮은 구석 하나 없는 두 섬 사이를 서성인다.

 

여기는 제주. 서쪽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 살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8월 말, 이 섬의 도민이 되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집을 떠나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땀 닦아내기’였다. 아저씨들의 손길이 닿은 모든 물건에는 새까만 구정물이 지문자국으로 남았고, 땀을 얼마나 떨구었는지 바닥이 흥건했다. 안 그래도 밤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느라 피곤에 절어 죽을 지경인데 추가 노동이라니. 복받쳐 오르는 짜증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클 만큼 그렇게 더웠다 (더운 날 이사는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았지만, 연 단위로 돌아가는 계약의 굴레는 지금까지도 여름마다 찾아온다).

 

그날 밤. 하루 종일 틀었던 에어컨을 멈추었다. 제주의 상쾌한 공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도시와는 다를 살랑살랑 시원한 공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창을 열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숨 막히는 젖은 공기에 짙게 배인 똥. 냄. 새.

 

난생처음 맡아보는 해괴한 암모니아 냄새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거친 숨 고르는 말처럼 나도 모르게 입술을 푸르릉 튕겼다. 간혹 시골길을 달리다 맡게 되는 구수한 고향의 향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고 한껏 신난 똥파리들이 들러붙는 질퍽한 푸세식 똥간 냄새도 아니고, 푹푹 찌는 여름날 쓰레기 수거차가 흘리고 간 음식쓰레기 국물 냄새도 아니었다. 혹시 무슨 일이 났나 현관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동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했다.

 

도대체 이건 무슨 냄새지?
설마 매일 이런 건 아니겠지?

 

오래지 않아 집 주변에 돼지 축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가장 먼저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고 공기청정기를 돌리는 모닝 루틴이 지겨웠다. 아파트 창문 꼭꼭 닫고 창문을 열 수 있는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생활을 벗어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마음 편히 들여 마실 공기였다. 세계 자연유산 제주에 오면 피톤치드 가득한 청량한 숲 향기를 마음껏 마시게 될 줄 알았다. 도시만 벗어나면 해방이라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심지어 이른 아침에는 매캐한 농약 냄새가 바람을 타고 스멀스멀 마을로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지, 여기 농촌이었지.

 

하루는 똥냄새가 나지 않아 신나게 창문을 활짝 열고 밤공기를 만끽하며 빨래를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딸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악 엄마 엄마 엄마! 일루 와 봐! 큰일 났어!

 

이 정도쯤은 익숙한 호출이다. 세탁실에서 일하던 손을 여전히 움직이며 “알았어~ 다친 건 아니지? 이것만 하고 금방 갈게~” 영혼 없는 위로의 멘트로 시간을 끌며 손을 더 바삐 움직였다. 그런데 비명이 잦아들지 않고 우당탕탕 더 소란스러워졌다. 이쯤 되면 고무장갑을 벗지 않을 수 없다. 한 숨 깊게 들이쉬고 어쩔 수 없이 출동.

 

꺄아아아악~!!! 꺆 꺆~!!!

 

여자 어른의 괴성에 어린이의 비명소리가 묻혔다. 분명 모기장 달린 창문은 빠짐없이 닫혀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이 동네 날개미 군단이 통째로 우리 집 거실로 이사를 오기라도 한 것인가. 천장과 바닥 그리고 벽 심지어 커튼과 가구도 빈 틈 없이 새카맣게 메꾸고 있었다. 온 집안에 들러붙은 이 낯선 생명체들 어떻게 우리 집에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항상 아이에게 말했다. 벌레도 집이 있고 길을 잃기도 한다고. 우리가 그들이 살던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있으니 실수로 들어와도 너그럽게 내보내 주자고. 그들의 집을 빼앗은 건 우리라고. 생명존중 사상을 자애롭게 설파하는 깨어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이 순간만은 다 필요 없었다.

 

일단 죽여어! 다 죽여!!!




알고 보니 우리 가족보다 먼저 이 집에 터를 잡은 레모니와 새 집사

그 이후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생명체와의 조우는 계속됐다. 외계 생명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와 공존할 거라 생각지 않았던 책에서나 보던 존재들 말이다. 마당에 뜬금없이 나타난 도마뱀이나 플라나리아(교과서에서 분명 봤는데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검색해서 알아냈다)부터 창가 유리에 다닥다닥 붙어 저녁 먹는 우리 가족을 구경하는 반딧불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현관문 잠금장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던 기계음 섞인 기괴한 노루의 울음소리 그리고 한두 번 마주친 것도 아닐 텐데 툭하면 꿱하는 쉰소리 내지르고 푸드덕거리며 줄행랑치는 꿩까지. 불시에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어도 이들과의 마주침이 싫지만은 않다.


집 밖을 나서면 왠지 모를 기대감에 목 운동이 절로 된다. 현관을 열면서부터 ‘레모니(딸이 이름 붙여준 우리 집에 매일 놀러 오는 길고양이)가 오늘은 밥을 남겼네’ 하며 두리번거리고, 운전을 하다 해안도로를 지나면 ‘오늘은 돌고래를 만나려나’ 고개를 쭉 빼게 된다. 봄에 오르는 오름에서는 달래와 고사리를 찾느라 고개를 땅에 떨구고, 여름 바다에서는 매와 같은 눈으로 바위 사이를 뒤지느라 위아래 양 옆으로 360도 돌아가는 레이다가 된다. 가을이면 마냥 초록이던 밭담 너머 들판은 노랑, 주황, 핑크, 보라로 형형색색 바뀌니 저 사이에 뭐가 매달렸나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겨울에는 한라산 꼭대기에 눈이 얼마나 쌓였나 자꾸만 먼 산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새로운 만남은 일 년 내내 계속된다.


사람들끼리만 부대끼며 살아 본 도시의 딸은 다양한 생명체와 어울려 사는 외딴섬 노지의 일상이 짜릿하고 화려하게만 느껴져 자꾸만 밖으로 나간다(아무리 그래도 뱀과 지네는 만나고 싶지 않지만).

 

 

얼마나 더 있다 돌아올 거야?
백 년!

애당초 온 가족이 일년살이를 계획하고 이 섬에 들어왔지만, 아빠가 일 때문에 육지로 복귀해야 했을 때도, 집의 연세 계약이 끝났을 때도,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눈치가 보일 때도 우리의 제주살이를 중단하지는 못했다. “프러포즈받은 적도 없는데 눈 떠 보니 결혼식장에 서 있더라고요”. 흔한 신부 인터뷰 내용처럼 특별한 결심 없이 이곳에서의 일상을 중단할 이유가 없어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일 년 후 떠나기로 한 계획을 철회한 데는 아이의 입김이 가장 쌨다. 외동딸 하나 키우는 우리 부부에게 아이의 의사는 영향력이 너무 커서, 제주도에 백 년을 살다 아빠가 있는 서울에 돌아가겠다는 아이의 말에 두드리던 계산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렇게 엄마와 딸은 제주에 남았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지금 하늘을 보라는 지인의 전화가 왔다. 오징어배 불빛이 구름에 반사되어 빛기둥으로 나타난 신기루 현상이었다.



미오의 두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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