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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태풍이 지나간 자리

무중력, 두려움과 자유로움 사이에서

열린 창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빗물은 순식간에 한강처럼 불어났다. 침대며 아래의 옷상자, 옆에 있는 협탁 그리고 티비장과 빨래 바구니가 그 위에 섬을 이루었다. 이 집에 자리 잡은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물건들을 도로 다 들어내게 생겼다.




그로부터 일주일 전, 아이의 새 담임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사 다음날 바로 걸려온 친절한 전화는 등교에 대한 안내와 더불어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온 만큼 섬의 사정을 조금 더 헤아려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정중하지만 경계가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코로나 유행으로 도외 입도 시 3일 후 등교가 가능하다는 규정을 보고 딱 맞춰 이사를 온 참이었지만, 혹시 모를 민폐보다는 일주일 자가격리를 택했다. 창 밖의 돌담과 길 건너 맹지의 전원적인 풍경에 위안을 삼으며 격리기간을 잘 버텨냈고, ‘이제 곧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짐 정리를 시작할 수 있다!’ 속으로 외치며 또 다른 노동을 위한 기대를 품었다. 손꼽아 기다린 아이의 등교를 하루 앞둔 일요일 오후, 학교에서 긴급 문자가 도착했다.


<태풍 휴교 안내>   


이건 또 뭐지? 태풍 때문에 학교를 안 간다고?


코로나 시국에도 전면 등교를 하는 학교가 태풍이 온다고 이틀이나 문을 닫는단다. 어차피 차로 등교할 텐데 비바람에 학교를 못 갈 정도일까, 어업에 종사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을 위한 배려일까, 아니면 수업일수 맞추느라 ‘오바’ 하는 건가. 물음표만 잔뜩 품고서 격리 생활을 조금 더 이어갔다.

태풍은 예상 경로대로 우리 집 위를 훑어갔다. 끄떡없이 잘 버텨준 제법 신축에 속하는 우리의 새집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열린 창 틈으로 굳이 빗물을 들여보냈고, 10시간의 정전까지 선물하고 지나갔다. 아직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 넣을 겨를이 없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입도 후 신고식을 제대로 치르고 근 열흘 만의 첫 등교 날(동시에 셀프 격리 해지 날), 뜬금없이 학교 앞 도로 위에 올라와 있는 고깃배와 아스팔트 차도와 인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수북이 쌓인 나뭇가지 그리고 학교 교실 앞 정원에 목 부러진 야자수를 보았다.


그렇지, 여기 섬나라 바닷가였지.


태풍이 오면 바다가 뒤집힌다고 한다.
떠밀려온 먼바다의 쓰레기와 어선의 잔재도 있지만, 고요한 바닷속 깊은 바닥을 유영하던 물고기도 물속 바람을 타고 먼 여행길을 나온다.
어부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풍어를 이뤄낸다.
바다가 숨을 쉬는 시간이다.

세상이 환상의 모험 세계로 보이던 새파랗게 어린 스무 살 초반,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바닷물에 떠밀려 태평양 건너 망망대해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필이면 그때 내 앞을 헤엄쳐 지나가던 얼굴 모를 은인 덕에 뭍으로 걸어 나온 이후, 얼마 전까지도 바다는 웬만하면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짝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없이 돌아서는 심정으로 말이다.

물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와 놀아주면서 바다와의 외면을 차츰 풀어갔지만, 이제는 깊은 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장구를 치다 발이 닿지 않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심장이 뚝 떨어졌다. 숨이 끊길 것 같아 더 이상 물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헛발질을 해서라도 발 끝이 땅에 닿아야 마음이 놓였다. 한때 수영을 즐기고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젊은 여자는 20년 후 아이랑 모래사장 앞에서 튜브 끼고 파도타기나 할 줄 아는 겁 많은 애 엄마가 되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느 날


이제 매일 바다를 본다. 바다는 볼 때마다 다르다. 색깔도 파도도 물결도 깊이도 볼 때마다 그렇게 달라진다. 떠다니는 쓰레기도 바뀌고, 거품이 이는 위치도 달라지고, 밀려오는 해초와 부유물도 매번 새롭다. 읽히지 않는 낯선 문자가 박힌 물건들을 먼바다에서 가져오기도 한다. 언제는 저 멀리서 별빛처럼 반짝이기만 하더니 어느새 얼굴 위로 물폭탄을 날린다. 이렇게나 시시각각 다른 매력을 선보이는 바다를 그저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다시 친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해녀 삼춘들 덕에 해냈다. (올여름, 20년 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싶다는 각오를 적은 지원서로 해녀학교에 합격하고 무사히 졸업했다.)


이제는 바닷속 깊은 바위틈에 끼어있는 성게도 캐낼 수 있고 찌그러진 맥주캔도 꺼내 올 수 있다. 뿔소라 밥 주려고 해온 미역이랑 톳 가득 담은 테왁 망사리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알게 되었다. 바위틈 사이 뾰족하게 내민 밤송이를 처음 봤을 때는 독이라도 손 끝에 닿을까 봐 기겁하고 도망갔던 서울 촌놈이었는데, 이제는 호맹이로 바위 사이를 긁듯이 탁 쳐서 물 위에 띄우고 손바닥으로 받아내는 스킬도 장전했다. 그러면 그 밤송이 같은 가시가 다리가 되어 뽈뽈뽈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바다로 도망을 시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름 내 찰지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 굳세게 바위에 붙어있던 보말은 가을이 되면 태풍과 파도에 휩쓸리고 뒹굴다 지쳐 기운을 잃고 살집이 쏙 빠져버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새파란 이불 되어 내 아이 동동 띄워 누여줬던 바닷물이 다음날엔 시커멓게 멍이 들어 집어삼킬 듯 사납게 달려드는 모습도 보았다.     


먼 곳으로 떠난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대륙을 건너 이사를 할 때, 혹은 물속을 유영하다 육지로 올라와 땅에 발을 디딜 때, 말 그대로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나는 그대로인데 어느 순간 둘러싸인 세상이 바뀌면 내 몸은 주변과 분리되어 껍질이 살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같다. 소라, 보말 그리고 고둥이 제 집 안에 문 닫고 숨어 있다가 거친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심정이 그러할까.


어릴 적 보았던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에서 주인공들이 공간이동을 할 때 흐느적거리며 떠다니는 터널 속 영상이 어지럽게 반복된다.



지금까지 꿈을 꾸다 깨어났나 아니면 방금 꿈속으로 들어왔나


지나고 보니 런던살이를 그리워한 것도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 런던살이를 포기한 것도 기대보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컸기 때문이다. 꿩 대신 닭 같은 선택이었던 제주살이 또한 어떤 긍정적인 기운이 나를 감싸고 머물게 하는 것이리라.

지금 내가 있는 장소의 기운이 압도적으로 느껴질 때는 잠시 멈추어 주변을 둘러보고 두근대는 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큰 숨을 들이쉬고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 어떤 기운을 가득 모은다. 그것을 안으로 들였다가 그 안의 것과 함께 실어내어 본다. 나를 이곳에 닿아 있게 한 그 모든 것에 고마움 비슷한 걸 느낀다.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경이로움이나 벅차오름과는 또 다른 무엇이다.


여기까지 떠밀려 온 연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섬 안에 고립되어 머물러지는 힘이 언제까지 미칠지, 언제쯤 어디로 향하는 바람을 타고 흘러가게 될지 지금은 모른다. 그 기운이 다하면 또 떠날 준비를 할 것이다. 내 계획표에는 아직 정착이라는 마침표가 없다. 덩치 큰 가구나 값비싼 가전제품을 소장하는 일도 아직이다. 혹여 이쯤에서 정착할까 하는 마음이 들어도 방심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는 나를 감싸는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려고 한껏 두 팔 벌리고 있다. 디딜만한 곳이 까마득해 겁이 덜컥 나더라도 힘 빼고 허공에 몸을 맡겨 본다. 발 닿을 곳 없이 손 뻗을 곳 없이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둥둥 떠 있어도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본다. 어쩌다 제주에 불시착한 나는 힘겹게 돌쟁이 아기를 초등학생까지 키워낸 서울로 돌아간다. 그리고 뜻밖의 아이를 품고 낳아 길렀던 캘리포니아를 들러, 부푼 꿈을 안고 당차게 인생의 2막을 시작했던 런던에 잠시 멈춘다. 그곳에서 지금, 여기의 시간에 살고 있는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어쩌면 여기 제주 섬에 내가 실려온 거라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또다시 내 위를 지나가는 태풍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나를 데려가 주면 좋겠다.
내 마음속에도 태풍이 들어와 몽땅 뒤집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 깊은 바닷속 뻘에 가라앉은 마음속 봉인된 상자를 떠올려주었으면…
 




미오의 여섯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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