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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미깡 딸 때 태어난 아기

엄마가 되다.


“애기 낳을 거면 예정일보다 빨리 낳든가 아님 더 천천히 낳으라이! 막 바쁠 때 낳지 마랑! 어떵 넌 애기도 딱 미깡 딸 때 낳젠햄 시니?!”


엄마는 매사 불만이 많으셨다. 나의 아이 예정일조차 불만이셨다. 아이의 예정일은 이 동네 대부분 사람이 집에 들어와 잠만 자고 다시 밭으로 나가야 하는 귤 수확이 시작할 때쯤이었다.


불만 가득한 엄마를 보며 나는 침묵하는 대신 독백을 즐기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애기가 그때 나오켄 하는디 나보고 어떵하랜 말이꽈? 미깡 딸 때 애기 나오민 다시 뱃속으로 들어가랜 해야될꺼꽈?’     


엄마의 불안은 현실이 되어 딱 우리 집 귤 수확이 시작될 무렵 나의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귤처럼 동글동글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혼자 이삿짐을 싸는 건 여전히 버겁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구 교체며 가구 옮기기며 뭐든 척척 해내는 게 익숙한 억척 아줌마가 된 듯한데도 정리 젬병인 나에게 짐을 꾸리고 푸는 건 두통이 정수리로부터 시작해서 귀밑에서 머무는 큰 스트레스다.

“자 이제 다 됐습니다. 이사 비용은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4톤 트럭에서 보라색 박스가 마지막으로 내려지고 이삿짐센터 기사분들은 장갑을 바지에 털며 그 자리를 떠나셨다.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우리 집이다. 우리 집…503호.     

신기하게도 너와 함께 살던 우리의 첫 집도 503호였다.     

차가운 마루에 볼을 대고 가만히 누워본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네가 없는 이 모든 것이 꿈인 것 같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볼이 차다. 꿈이 아니다. 이 집에서의 첫날인데도 낯설지가 않은 걸 보니 꼭 네가 옆에 있는 것 같다.                




꿈 많은 대학생은 휴학하고 유학을 결심했다. 비행깃값이라도 벌어보고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던 중이었다. 출근길에 같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내가 일하던 곳은 큰 도로변 1층에 통유리로 되어있는 미술학원이었다. 그 건너편에는 면을 파는 작은 식당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식당 직원분이 출입문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출근길 고개를 들면 그 얼굴이 보였다.

그 사람과 일면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기는 은행을 가면 고모가 앉아있고 카페에 가면 중학교 은사님도 만날 수 있는 작은 곳이다. 길에서도 쉽게 지인을 만날 수 있어 언제라도 자동으로 고개를 숙일 준비를 해야 하는 세상 예의 바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동네이니까.     


‘뭐야 저 사람? 왜 매일 이 시간에 여기 앉아있는 거야? 거슬리게.’     

하루는 지나가는데 신문을 펼친 그를 보았고,

‘어?? 신문도 읽어??’ 하며 다시 한번 보게 되었는데…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문의 글자가 거꾸로 되어있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저기요 밥 한번 먹어요. 밥이 안 되면 차라도…” 고전적인 멘트를 날리며 내 앞에 나타났다. 학원 회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친구를 만나고 늦은 귀가에도 우리 집 골목에 그가 있었다.  '그래 뭐 어차피 나는 떠날 몸인데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지 뭐. 딱 그 정도로만.’  


그 사람이 매일 날리던 대사처럼 우리는 차도 마시고 밥도 먹었다. 지쳐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겠다는 문자를 남기니 영양제가 담긴 약국 봉투를 내밀었고 함께 마신 커피 컵 버리겠다고 가지고 가더니 깨끗하게 씻어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지를 써주었다.     

어느 날 창문을 열어보라는 문자에 창문을 열어보니 하얀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가 우리 집 옥상에 올라가 눈을 뿌려주고 있었다. 11월. 때 이른 겨울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춥지만 마음은 더 따뜻해지는 계절.     

우린 함께 웃었고 이 인연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어느새 여느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나 사랑받고 있어요~' 외치며 자랑하고 싶은 날들이었다. 이렇게 계속 지내면 어떨까 하다가도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꿈에서 영영 멀어질 것만 같아 예정된 길을 갈 준비와 작별 인사도 함께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일하던 식당 면이 먹고 싶다는 나의 문자에 그는 퇴근길에 음식을 포장해 왔다. 차에서 음식을 먹으려고 뚜껑을 여는 순간 그렇게 먹고 싶던 음식이 냄새조차 맡기가 싫었다.

‘어?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엄청나게 먹고 싶었는데 갑자기 왜 속이 안 좋지?’

더 냄새를 맡다가는 차에 실수라도 할 것 같아 황급히 뚜껑을 닫았다.

“나 몸살인가 봐요. 춥고 속이 좋질 않아서 먹지 못하겠어요. 미안해요.”     

그날 옥상에서는 몸살약이 내려왔다.

약을 먹고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떨리는 손으로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임신이었다.     





혼란스러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제야 정신 차리고 좀 잘살아보려고 했는데. 공부하고 멋지게 돌아오려고 했는데... 나도 엄마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는데... 왜 난 맨날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눈물만 흐르던 나에게 아기를 낳자고 한 건 그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도 겨우 면도를 베이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솜털이 사라지지 않은 어린 청년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리 크고 단단하게 느껴졌는지...


속은 계속 울렁댔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그 사람이 사다 준 새콤달콤만 입 안에서 굴리며 방구석에 앉아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입덧이 마치 아이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인 것만 같았다.

'똑똑. 엄마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엄마랑 함께 있어요.'     


그래, 나 엄마야! 내가 네 엄마야!!! 낳자!!! 나 아기 낳을 거야! 나 엄마가 될 거야.





“무사 영 고집 부리멘. 엄마가 부탁햄시녜게. 너 하고 싶은 거 많댄 했잖아! 지금 애기 낳으민 진짜 아무것도 못하메. 엄마 진짜 죽어지크라. 제발 엄마 말 들으라! 제발!!”     

강해 보이기만 했던 엄마가 새벽 네 시까지 내 옆에 누웠다가 앉아서 나를 달래시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울기를 반복했다. 태어나 엄마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는 건 외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이후 처음으로 보았다. 엄마는 낯설 만큼 웃음도 눈물도 보이지 않는 분이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니 우리 아이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다. 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도 항상 외로움으로 웅크린 모습만 떠오르는 내 어린 시절 대신 노란 햇살 같은 따뜻한 유년 시절을 선물하고 싶었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를 어루만지면서 난 이 아이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벌초가 끝나면 바로 병원에 가자고 하셨다. 일방적 통보였다.

거실에 있던 동생에게 언니 똑바로 지키라는 엄마의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닫혔다. 방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부랴부랴 백팩 하나에 짐을 싸고 종이가방에 대충 이것저것 구겨 넣은 후 방문을 두드리며 동생에게 협박했다.

"문 열어! 안 열면 나 뛰어내린다!" 그때 우리 집은 큰 길가에 4층.

동생은 울면서 문을 열어주었고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왔다. (정말 미안하다. 동생아....) 

자취하는 친구의 집에서 하루하루 보냈으나 입덧이 너무 심해 하루종일 방 안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혼자 사는 처지가 아닌 친구가 나를 보며 힘들었는지 몰래 우리 집으로 연락했다. 나를 찾아 바다까지 건넜던 그 사람이 울면서 나를 데리러 왔고 따뜻했던 봄날에 사시나무 떨듯 오들오들 떨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나를 보지 않으셨다. 대신 무릎을 꿇고 있던 우리를 보며 편하게 앉으라고 하셨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울부짖는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결혼하고 아기 낳아!"




아빠와 함께 걸으며 연습도 여러 번 했지만, 결혼식은 시작도 전에 눈물바다가 되어 손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입장을 했다. 나는 입꼬리가 내려가 못난이 인형 같은 얼굴 사진만 가득한 5월의 신부가 되었다.     

불효가 특기여서 엄마의 걱정대로 귤 수확 시기에 아이를 낳았다. 나는 엄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그 사람은 아빠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동화 속 해피엔딩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끝맺음을 짓게 될 거로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라는 이름을 얻으며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거라 믿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





하다의 첫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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