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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무화과는 엄마 거

친정엄마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돌아갈 곳이 친정집뿐이라니.

30대가 되면 누구보다 멋있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 줄 알았지. 빈털터리에 혼자만의 몸뚱이도 아닌 두 아이까지 옆구리에 끼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 그렇게 나오려고 애썼던 곳일 줄 누가 알았겠어.     


친정살이는 예상대로 순탄치 않았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린 나 대신 엄마의 잔소리는 아이들로 향하였다.

뛰지 말라, 떠들지 말라, 빨리 일어나라, 밥 먹으라.

아이들에게 향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붑써 야이네도 다 알앙 합니다! (그냥 놔두세요. 얘들도 알아서 다 할 수 있어요.)” 

내붑써...내붑써...내붑써만 수십 번 반복했다.


뛰어난 절약 정신으로 이 정도 온수면 다 씻을 수 있다고 빨간 대야에 물이 가득 차면 가차 없이 보일러를 끄셨다. 샴푸를 대충 헹구고 그 물로 재빠르게 몸까지 씻겼다. 수건으로 온몸을 감싸고 춥다고 할까 봐 일부러 발이 빨갛게 되어 아프다고 할 때까지 쥐고 있었다. 마음에는 차가운 물보다 더 찬 바람이 불어왔다.

'독립하면 보일러 등 지져질 정도로 오래 틀어야지. 우리 아기들 몸도 마음도 춥지 않게. 얼른 독립하자! 그리고 보일러 빵빵하게 틀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엄마가 되자!' 

아이들 발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눈물은 마음으로 삼키고 아이들에게는 미소를 보였다.    


언니, 동생들은 어찌 저리도 잘 사는지 알아서 척척, 스스로 어른이다. 가끔 비행기를 타고 아이들 보겠다고 내려오는 언니와 동생 가족들이 고맙기는 했지만 두 팔 벌려 환영은 하지 못했다. 그 온전한 가족을 볼 때마다 친정 식구들에게는 물론 나의 아이들에게까지도 나는 왜 보통의 평범한 가족 구성원조차 만들 수 없는 인간인지 무능하고 한심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모든 게 나의 잘못 같았다. 아이들 아빠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내 탓인 것만 같았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알 중 가장 작고 못생긴 메추리 알 같은 느낌을 벗어날 수 없었다.           




친구가 가져오기로 한 한복은 없었다. 아마 처음부터 가져오지 않으려 한 것 같다. (그 친구는 평소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부채를 펼치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복도에서 그걸 보고 있자니 내 머리도 빙글빙글 돌아간다.


‘왜 엄마는 한복 한 벌 마련해주지도 않고! 우리 거지야? 우리 거지 아니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애초 나의 운동회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엄마에게 운동회란 눈에 띄지 않는 둘째보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첫째, 셋째, 넷째 그리고 장손 보시겠다고 오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점심까지 챙겨야 하는 큰 행사였을 테니까.


우리 반 친구이자 엄마 친구 딸인 그 애가 운동회 당일 한복을 빌려준다고 했다. 뭔가 좀 의심쩍긴 했지만 분명 그랬다. 그래서 난 어젯밤에도 부채를 펼쳐보며 웃는 연습을 했는데... 그 녀석이 안 가지고 왔다. 사과의 말도 없었다. 5학년 모든 여학생이 운동장에서 부채춤을 추고 있는데 나만 덩그러니 우리 반 교실에 있다가 너무 분해서 의자를 박차고 복도에 나가 아이들이 하는 걸 보다가 다시 교실에 들어와 책상에 엎드렸다. 눈을 감아도 한복이 보였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부채가 보였다.


“5학년 친구들의 멋진 부채춤 잘 봤습니다”

회장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익숙한 목소리다. 언니다. 잘난 언니를 둔 덕분에 어딜 가든 난 이름보다는 언니의 동생으로 불렸다.

‘뭐가 멋지다는 거야? 제 동생은 지금 혼자 교실에 앉아있는데!’ 언니의 잘못도 아닌데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교단으로 달려가 언니의 입을 한 대 치는 상상을 했다. 엄마는 부채춤 하는 친구들 사이에 내가 없는 줄도 모르고 언니의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걸 들으며 뿌듯해하고 계시겠지. 이 모든 게 엄마 때문이다. 한복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했던 친구보다 운동회 준비물조차 신경 써주지 않는 엄마가 더 미웠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그때 서야 비로소 친정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고들 하던데 어찌 된 일인지 아이가 커 갈수록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원망만 커졌다. 반찬을 만들고 청소하면서 '우리 엄마는 종갓집 맏며느리 역할에 우리 넷까지 키우느라 힘들었겠다.' 하다가도 아이를 안을 때, 화가 나는 상황이지만 아이 눈을 보고 괜찮다고 이야기를 하게 될 때면 '우리 엄마도 조금만 더 다정했더라면, 조금만 더 미운 오리 새끼에게 관심을 가져주셨다면...' 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 왔다 갔다 했다. 엄마가 옆에 있어도 늘 엄마가 그리웠다.


우리 엄마는 나의 엄마가 아니었다. 똑똑한 전교 1등인 언니의 엄마였고, 종손으로 태어난 남동생의 엄마였고, 애교 많고 예쁜 여동생의 엄마였다. 엄마 품에서 엄마 냄새 맡으며 잠들고 싶었지만, 그 자리가 내 차지였던 적은 없다. 내 자리는 엄마 옷에 코를 파묻고 한없이 껴안고 있던 세탁기 옆이었다.


엄마가 편찮으셔서 서울로 병원을 다니셨을 때 어쩌다 나를 데리고 가셨는데 숙소로 가는 길목, 많은 인파 속에서 나를 잃어버릴까 봐 손을 잡아주셨다. 너무 좋아 찌리릿 전기가 귀까지 흐르는 것 같았지만 손을 잡는 것조차 낯설어 그날 잡은 손의 촉감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엄마의 손은 가늘고 길었지만 쭈글쭈글했다.     


같은 공간을 써야 하는 곳에 비교 대상이 있다는 것은 쓸쓸함을 아는 아이로 만들었다. 그 아이는 그곳에서 긴장하고 방황하며 어울리지 못하고 맴돌았다.




몇 해 전 엄마는 우울증을 앓으셨다. 병원에 가자는 말도 듣지 않고 내가 무슨 의사 선생님이라도 되듯이 반기지도 않는데 우리 집에 오셨다. 그러고는 대꾸도 없는 무뚝뚝한 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예전에 아빠가 잘못해서 너희 넷 놔두고 도망갈까 생각도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는 이야기, 어릴 때 미군 트럭이 지나가면 기브 미 초콜릿을 외쳤던 이야기, 동생들 엎고 학교 다녔다는 이야기 (물론 나는 옆에 있긴 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언제 가실까? 만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등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뜻밖의 말이 나왔다. 너를 키운 기억이 없어 미안하다고. 티브이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걸 엄마는 보지 못했을 거다. 나는 무뚝뚝하기도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는 독한 딸이기도 하니까.


기억 속 엄마는 항상 나를 째려보고, 파리채를 들고 넌 누굴 닮아서 영 멍청하냐고 때리시고, 공부 못하면 밥도 먹지 말라고 소리 지르시던 무섭기만 한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내가 평생 듣고 싶었던 그 한 마디를 듣게 된다니. 보이지 않는 그녀의 주름진 손이 내 등을 어루만지다가 손을 잡았다. 나도 그 손을 놓지 않고 꼭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는 화해를 했다.     



마흔이 넘은 딸과 칠순을 바라보는 엄마는 연극을 보고 커피숍에 가서 따뜻한 라테도 마시며 처음으로 둘 만의 시간을 가졌다.  네 아이의 엄마는 처음이었던 복선 씨가 이제라도 둘째 딸 키우는 재미를 알아가셨으면 한다.


시장을 볼 때 엄마의 간식을 잊지 않는다. 요즘은 무화과와 포도를 많이 샀다. 무화과는 엄마 거 포도는 아빠 거. 간식을 친정집에 놓고 오면서 그동안 쌓아 온 원망의 마음도 조금씩 덜어내고 온다. 




하다의 두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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