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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분홍 소시지

보낼 수 없는 편지

뭐가 그리 좋을까?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다가와 밥 먹자, 차 마시자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아니요. 저 시간 없어요.

매몰차게 뿌리치면 다음 날 또다시 나타나 밥 먹자고 웃던 너.

넌 나의 뭐가 그리 좋았니?

널 만날 수 없다고 나는 떠날 몸이라고 2장의 편지지에 내 이야기를 전했던 날.

우리 집 앞 길바닥에서 잘 정도로

너는 나의 뭐가 그리 좋았니?

내 동그란 코가 좋았을까? 내 동그란 눈이 좋았을까? 작은 손이 좋았나?

지금은 단발에 흰머리도 많이 보이지만 길고 검던 내 머리카락이 좋았을까?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밀어내고 밀어내도 다가오는 네가 나도 조금은 좋았어.

언제부터인가 내 눈이 먼저 너를 쫓고 있을 만큼.          





친구와 동네 술집을 찾았다. 빨간색 간판, 입구에는 반건조 노가리라고 크게 쓰인 호프집에서 기본 안주로 양은 도시락이 나왔다.

-이거 오랜만에 본다.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보인 분홍 소시지 반찬. 하나는 너 먹으라는 친구 말에 대답은 하지 못하고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꿀떡꿀떡 맥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를 삼키며.     


네가 그렇게 한 번만 사달라며 애원하는데도

-안돼! 이거 몸에 진짜 안 좋아~~ 색소 다 흡수될걸?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면 넌 포기하지 않고 내가 정신없이 장을 보는 순간 카트 맨 아래 그 분홍색 소시지를 숨겨 놓곤 했다. 계산할 제야 발견하면 나는 너를 흘겨보았고 넌 카트에 앉아있는 아이에게 알 수 없는 대화를 하며 내 눈을 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릇하게 계란물 입혀 구워주는 건데......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 소시지 반찬 한 번을 못 해줬을까..      




거기는 어때? 춥지는 않아?.......

보낼 수 없는 편지.     



우리 조금만 있으면 함께 했던 시간과 떨어진 시간이 비슷해지는 시기가 다가와. 난 아직도 너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이 글을 시작하기까지 왜 그리 용기가 나질 않았던 걸까. 나는 언제까지 너, 그리고 나를 외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까?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 둘 다 너무 쑥스러워서 너는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며 달리고 난 창밖의 지나가는 나무들만 보며 대화도 몇 마디 나누지 못했지. 무슨 목 깁스를 한 사람들처럼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그렇게 한참을 가도 네가 알아 둔 식당이 나타나지 않자 결국  손님은 우리뿐이던 이상한 해물탕집에 들어가 해물탕 먹었잖아. 실내가 온통 하늘색 페인트로 칠해져서 꼭 수족관 안에서 밥을 먹고 있는 기분이 들었던 해물탕집. 그때 밖에서 친구와 통화할 때 살짝 들었는데 설레어서 전날 한숨도 못 잤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미안하던지. 내비도 없던 시절 맛있는 식당 찾아가려고 애쓰고, 해물 껍질들 다 까주고, 식당에서 나올 때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신발을 돌려주는 너를 보며 내 마음도 열렸던 것 같아. 그날 이후 출근길에 손을 흔들어 주는 너에게 나도 쭈뼛쭈뼛 손을 들어 보였지.


덜컥 아기가 생겼고 눈물을 보이던 나와는 달리 내 손을 잡으며 낳자는 너의 말에 기댈 수 있는 언덕 같아 안심도 되었지만 나는 두려움이 너무 컸어. 우린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꿈도 많은 나이였으니까. 망설임 없는 너의 말이 그냥 마냥 내가 좋아서 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뱃속 아기를 지켜내기 위해 넌 얼마나 큰 무게를 이겨내고 뱉은 말이었는지 나는 이제야 깨달아.


새 생명이 갑자기 찾아오듯 삶의 마지막 순간도 갑자기 올 수 있다는 걸 그때는 왜 알지 못했을까. 미리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면 네 손 한 번 더 잡아줬을 텐데, 사랑한다는 말도 아끼지 않았을 텐데. 그런 이별은 세상 풍파 다 겪고 준비를 마친, 할머니가 되어야 찾아올 거로 생각했지. 이렇게, 갑자기, 어느 날 일어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어.     


너의 아내로 살다가 미망인이란 단어가 내 이름 앞에 붙은 그날부터 세상이 너무 낯설더라. 우리가 살던 집, 함께 누워서 잔 침대, 내 옆에 멀뚱멀뚱 나만 바라보는 우리 아이들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어제까지 당연했던 모든 일들이 오늘부터는 하나도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어. 하루아침에 나와 우리 아이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네가 만든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어 널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되뇌었지. 힘내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고도 폭력적이기까지 한 위로의 말인지.


응어리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어깨를 들썩일 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액체를 닦아주는 게 다는 아니더라. 고요하게 옆에 앉아 마음의 방을 잠시 내어줄 수 있는 배려가 아픈 이를 다시 일으키고, 거울을 보고, 세수를 하고, 밥을 먹게 할 힘이 되더라.


네가 떠나고 자주 멍하고 자주 하늘을 보게 돼. 또렷한 기억은 별로 없고 흐리멍덩히 늘 꿈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야. 옆에 있다면 주저리주저리 할 이야기들이 참 많아.


오늘 우리 첫째는 추운데 멋 낸다고 얇은 티에 치마만 입고 나갔다가 몸살감기에 걸려 누워있다는 이야기, 둘째는 비가 오는데 귀찮다고 우산도 안 들고 가서 속 터진다는 이야기, 점심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잔치국수를 먹었다는 뭐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네가 만든 참치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 곁들이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은데. 난 오늘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혼자 식탁에 앉아 아이들이 틀어놓고 간 재미없는 티브이 화면만 멍하니 보며 하루를 마무리해.


넌 거기서 나 없이 어떻게 지내?     


가끔 시간이 흐른 뒤 너를 만날 그날을 머릿속으로 그려. 네가 있는 그곳은 따뜻하면서도 환한 빛과 아름다운 여러 꽃들로 둘러싸여 있을 것 같아. 마치 결혼식장처럼. 그런데 상상 속에서 엄청 억울한 게 뭔 줄 알아? 난 항상 흰머리에 주름 성성한 할머니고 넌 내 기억 속에서 멈춘 서른다섯 살의 젊은 남자라는 거. 네가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지?     


막상 너를 만나게 되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그리움인지 원망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릴 것 같으니 편지를 들고 가야지. 봉투에 내 이름과 네 이름을 크게 쓰고 네가 날 기억할 수 있는 일들을 몇 자 적어 너에게 갈게.


그럼 너는 아무 말 말고 먼 길 걸어온 나를 그냥 바라봐줘. 그리고 머리만 한번 쓰다듬어줘. 기특하다고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고생 많았다고. 난 그거면 충분해.


비록 결혼식장에서는 입꼬리 내린 채 울며 네 앞으로 걸어갔지만, 다시 만나는 그날에는 눈은 슬플지 몰라도 입꼬리 올리고 웃으며 걸어갈 거야. 너는 그때처럼 내 손을 잡아줘.     





아닌 줄 알았는데 나는 네가 보고 싶다. 네 살 냄새도 투박한 네 손도.

그 해. 여름이 오고 있는데 나는 널 보내는 날 입었던 옷을 벗지 못하고 한동안 입고 다녔다.

그 옷을 입고 있어야만 보지 못해도 바람에 흩어지는 내 체취로 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혼자 가는 그 길 외롭고 무섭지 말라고 어쩌다 외출을 하게 되는 날이면 꼭 그 옷을 꺼내 입었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세탁도 하지 못하고 옷장 한쪽에 넣어 두었던 네이비색 봄 외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다가 그 옷을 버리면서 너의 기억도 내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사연들을 간직하고 사는 존재니까 가슴에 그 사연을 하나하나 접어 자신조차도 보지 못하고 꼭꼭 숨겨 놓고 지내면 뭐, 보통의 삶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혼자 짐 들고 계단을 오를 때 자기가 그리울 거라고.


아니, 나는 계단을 오를 때도 네가 생각나지만 잘 차려진 음식 앞에서 네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 예쁠 때, 선물처럼 무지개가 떠오를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네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아무것도 모르고 눈만 껌뻑 껌뻑, 내 손을 조용히 잡아주던 꼬물이 둘째가 벌써 여드름이 난 사춘기 중학생이 되었다. 나에게만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이제는 붙잡고 싶어도 빠르게 달려간다. 모든 것을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외롭게 했지만 그 외로움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몇 번 더 우리의 이야기를 꺼내 보며 널 만나러 갈 준비를 차곡차곡해야지.


마흔한 살의 여자는 서른세 살의 여자를 바라본다.

고생했다는 눈인사와 함께.

서른세 살의 여자는 마흔한 살의 여자를 바라본다.

잘 버텨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며.

살아내지 말고 살아가라고 서로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추신, 올해는 햄 꼬치 전 올렸지만,

내년에는 따뜻한 밥, 국과 함께 꼭 분홍색 소시지 노릇하게 익혀 올려줄게.







하다의 세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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