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제주
“ 우리 제주 가서 한 달 살고 올래? ”
“ 너 돈 있니? ”
“ 아니 ”
“ 자 그냥 … ”
어쩌다 보니 여기, 나의 머무름이 닿은 10번째 도시 제주.
3월 초, 입으론 봄이라 외치지만 체감은 겨울에 가까운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3월 초, 우리는 제주였다.
“ 어쩌다 제주 내려가게 된 거야? ”
“ 제주에서 사는 건 어때? ”
“ 아이한테 정말 좋겠다 ”
제주행을 택한 건 코로나 덕분이다. 덕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걸 보니 나는 여전히 철없이 감사한 마음이 큰 듯하다. 아이 때문에 간다고들 셀프 수긍하던데, 나는 맹모삼천지교 그릇이 못 된다. 내가 살고 봐야 아이도 행복할 거라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진 흔하지 않은 카테고리의 엄마 중 하나이다. 굳이 하찮게 변명을 하나 하자면,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평화롭다.
코로나가 터지고 남편은 이직을 하게 되었다. 새로 들어간 회사는 입사한 지 한 달만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인센티브를 주었다.
어딜 가든 어느 톡방이든 내게 ‘부러워’ ‘좋겠다’ 꿀 바른 듯 달달한 말들을 건네 왔지만 나는 묘하게 99% 카카오처럼 입 안 가득 쌉싸름했다. 사실 남들이 내게 보내는 그 반짝이는 시선을 내심 즐기고 있었는데, 티 내자니 우쭐거리는 내 모습이 후져 보일 것 같아 꾹 참았다(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도 정말 잘했다 나란 인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쌉싸름함이 작은 복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린 정말 눈만 마주치면 서로에게 더 매서운 칼날을 날렸고, 일도 육아도 집도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속이 텅 빈 서른다섯을 보냈다. 아이는 아이대로 짙어지는 자아를 어쩔 줄 몰라 격하게 표출했고, 그걸 흡수하지 못한 나란 엄마는 매일 같이 득음을 하며 소리꾼으로 성장 중이었다.
치열한 계절을 하나하나 보내던 중 남편이 내게 노크했다.
“ 우리 제주 가서 한 달 살고 올래? ”
- 내가 모르는 보너스가 있었던 거니?
- 얼마 되지도 않는 그 용돈 … 설마 안 쓰고 모은 거니?
그. 럴. 리. 가.
계좌에 더 많이(훨씬 많이) 이바지하는 자의 발언이라 내심 기대했지만, 풍선 바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김이 빠졌다. 왜 괜한 얘기를 해서 나의 바이오리듬을 날뛰게 하는가! 분노 게이지만 쌓이는 밤이었다.
두 달 뒤 남편은 또다시 노크했다.
“ 우리 제주 가서 한 달 살고 올래? ”
“ 너 돈 있니? ”
“ 집 한 번 알아봐 ”
“!!!!!!!!!!!!!!!"
날을 샜지만 피곤하지 않았고 시린 안구에 탁해진 혈색에도 나는 카페인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날따라 아이가 보채고 엉겨 붙고 밥도 잠도 무엇하나 도와주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사는 곳이 바뀌고 바다를 건넌다고 해서 나의 현재 직책(엄마)과 위치(아내)가 바뀌진 않겠지만, 구름보다 더 높은 곳까지 날아오를 듯했다. 내 몸속에는 제주 앞바다 같은 푸른 피가 흐르고 있고, 서귀포 효돈마을의 잘 익은 귤색 같은 싱그러운 에너지가 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컨펌을 기다리는 순간은 찰나였으나 상당히 쫄깃했다. 행여나 여기저기 말하다 입방정으로 끝나버릴까 싶어 가벼운 손가락 꼭 붙들어 매고 그의 입이 들썩이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부디 내가 기다리고 있는 그 대답을 해줘,
너는 그 답을 해야만 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광야로 나가는 거야.
우리는 작은 마당과 돌담이 있는 구옥을 개조한 제주스러운 집에서 한 달을 보냈다. 코로나로 외출이 어려운 시기였던지라 미친 4세의 텐션을 지붕 아래 가둬둘 순 없었다. 밤을 새워 준비한 한달살이는 훌륭했다. 예민한 35세와 까다로운 4세의 마음을 제대로 격파하였다. 이 희열은 어찌나 든든한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간식을 먹지 않아도 입 안이 달달했다. 30개월 갓 지난 아이가 울어대도 숟가락 던져대도 그저 오케이!
한 달간 지낼 집을 예약하고 돈을 입금하고 배를 예약하고 일정을 정리했다. 내뱉은 지 24시간 채 지나지 않아 이 모든 걸 마무리지었고 그날은 우리가 일상 탈출 하기 정확히 2주 전인 날이었다.
우리의 탈출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도착한 첫날, 나는 맥주 한 잔 하고 씻을 것인지 씻고 마실 것인지 사뭇 진지하게 고민하다 씻고 개운하게 마시자 결정 내렸다. 후회 안 하기로 유명한 내가 아직까지도 곱씹는 게 바로, 이 날 마시지 않은 맥주다. 욕실에서 나오다 낮은 턱에 발이 심하게 부딪혔고, 엄지발가락에 붉은 선이 한 줄 두 줄 생기더니, 주륵주르륵 선명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괜찮아지고 싶었다. 이것은 마치 나의 제주살이를 함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120도 돌아가버린 발톱을 내 손으로 다시 조심스레 돌려보았다. 그리고 키친타월로 지그시 눌러주었다. 원 방향으로 돌려준 발톱을 보며 오래간만에 간절하게 신을 불러보았다.
‘ 이건 아무 일도 아니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고 우리의 한 달도 괜찮을 거야 ’
제주에서의 첫 일정은 안타깝게도 발톱 뽑기였다. 한 달간 붕대에 약에 음. 주. 절. 대. 금. 지.
3월의 꽃샘추위를 맨발로 맞이하는 기분은 그리 달갑지 않았고, 남편은 제주까지 와서 간호를 하게 되었다며 이럴 거면 차라리 집이 낫다고 웃는 눈을 가지고 입으로 마른 총질을 해댔다. 다친 발로 아이는 물론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계획한 일정을 모두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주말에만 쉬는 남편에겐 제주에서의 삶은 겉껍질 핥는 수준이었다. 우리가 기대한 그 2주 간의 설렘은 점점 투명해져 갔다.
그러던 중 표선에 정착한 지 1년 된 지인을 만나 제주에서의 삶에 대해 듣게 되었고, 옆 테이블에서 다른 일행인 척하던 남편의 콧구멍은 커질 대로 커졌다. 우리는 갖은 타당성을 서로 겨루 듯 대기 시작했다.
“어차피 전세계약도 끝나가니까” “아이가 매일 바다를 찾잖아” “자연 보고 사니까 마음이 편해”
부부가 쌍으로 정신승리 끝판왕들이다. 역시 끼리끼리는 과학이다.
그날 저녁 아이 밥을 먹이며 우린 집을 찾기 시작했고, 다음날 훨씬 더 넓은 마당을 가진 적당한 2층 집을 계약하며 영역표시를 하였다.
각져있던 빠듯한 도시에서 나와 모난 구석 하나 없는 여유로운 제주.
어쩌다 보니 여기에, 우리 세 식구 엉덩이 탁탁 털고 앉아있다.
히뽀의 두 번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