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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꼴리는 대로

살고 싶은 철없는 엄마의 이야기

“ 이게 최선이야... ”


몇 시쯤이었을까. 칠흑 같은 어둠을 넘어선 아무것도 없는 먹먹하고 막막한 밤. 별도 달도 눈치껏 입을 다물어 준 밤. 혼자 만의 감정에 취해 흘러가는 시간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도저히 이렇게 잠들 수 없었다. 밤 열한 시면 감기는 그의 눈꺼풀을 굳이 붙들어 맸다.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귓가에 따가운 말들을 내뱉었다. 세상 제일 힘들고 불쌍한 사람 같던, 지나가는 낙엽만 봐도 짜증이 나던 엄마 10개월 차. 그렇게 우리의 편하지 않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만지작만지작 하도 만져 시커메진 베개 모서리에 나의 불안함을 숨겼다.  


저 멀리 시속 157km로 달려오고 있다. 출발지는 명치 깊은 곳, 도착지는 코 끝. 터질 듯 위태위태한 뜨거운 감정이 주체할 겨를 없이 달려오고 있다.


“ 네 눈에 부족하겠지만, 내 딴에는... 하아... 이게 최선이야... ”


간신히 꾹꾹 누르며 쥐어짜 낸 한 마디.

집안일도, 육아도, 일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옷깃만 스쳐도 짜증을 내던 나의 변명 시간.


‘ 점심 그 메뉴 맛있었는데 ’

‘ 아까 지영이가 해준 얘기 재미있었지, 뭐였더라... ’

‘ 내일 연진이랑 약속에 옷 뭐 입을까?’


울지 않으려 뇌를 무척이나 귀찮게 했지만, 이미 턱 끝은 폭포가 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 또 울었다. 또 눈물을 보였다, 그 앞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도 아니고, 졸졸졸 흐르는 봄 시냇가도 아니었다. 댐의 수문이 열렸다.




사실 이러한 증세는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신 3주 4일이세요"


혹시 몰라 피와 소변 모두 해보았지만,  임산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도망칠 수 없는 팩트였다. 눈앞이 캄캄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절망적이었다. 왜 가 본 적 없는 군대 이야기 중 흔히들 하는 이야기 있지 않나.


- 눈 감아봐, 뭐가 보이나?

-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그래, 그게 네 미래다!


임신이란 건 내게, 마지못해 언젠가 해야만 하는 미루고 또 미루고 싶은 하기 싫어 미치겠는 숙제였다. 임신을 했다는 건 이미 결혼을 했다는 걸 테고. 사실 결혼부터 스스로와 많은 타협을 하고 결정한 인생 빅 이벤트였다. 늘 주위 사람들은 '넌 결혼이랑 안 어울려' '넌 혼자 잘 살 거 같아' 주술 같은 이야기들을 해왔고, 나 역시 홀린 듯 '그래, 나는 결혼보단 내 인생 잘 사는 게 더 좋아' 생각으로 20대를 보내왔다. 정신 차리니 새빨간 도장 쾅 찍은 종이 한 장으로 신분이 달라졌다. 견고하던 신념과는 달리 결혼은 기대 이상의 만족도를 안겨주었다. 참 낯간지러워서 남들에게 행복하라는 말도 못 하는 인물인데, 딱히 가져 올 단어가 행복 말곤 없다.


“ 결혼은 말이야~ 진흙탕에 저벅저벅 들어가는, 짙은 쇠 냄새 풀풀 풍기는 족쇄를 차는 그런 게 아니야 ~ 정말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막 절로 나고, 설령 싸워도 서로 살갗이 닿으면 바로 풀린다니까 ~ 진짜야 진짜! 팔베개 베고 누우면 다른 팔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꼬옥 안아주는데 아무 고민이 없고 행복해져”

놀랍게도 어느새 결혼 전도사가 되어있었다.



그 행복함을 누리고 있을 무렵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 거다.


 '임신? 내가 임신? 10달 동안 몸에 품고, 관 들어갈 때까지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다니!'


임산부의 하루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평소 예민한 편이던 나는 남들보다 일찍 몸이 달라진 걸 알았고, 그렇게 세상이 무너졌다. 더군다나 온갖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터라 그런 건지 그냥 원래 세상이 그런 건지, 임산부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 먹지 말아야 할 것,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직업인 임산부. 준비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모두 감시하는 눈빛들로 바라보고, 조언이라며 내뱉는 듣기 싫은 소리들은 더욱 현실을 괴롭게 만들었다. 매일이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그릇이 그 정도뿐이라는 게 명확히 보여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간장 종지 수준일 거라고 열 손가락 다 걸 수 있다.  


임신 초 "나는 아이가 둘 있었음 싶은데 너무 힘들어해서... "라고 말하던 남편은

임신 중반엔 "임신 뒷바라지가 힘들어서 애 둘은 못 낳겠어! 하나만 잘 키울 거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심중을 몸이 알고 있었는지 다양한 해프닝이 넘쳐났다. 3주부터 입덧에 하혈에 허리디스크에 태동이 없고 애가 내려와 있고, 다양한 이유들로 10달을 거의 누워서 보냈다. 당연히 모든 집안일은 남편 몫이었고, 불쌍한 그는 식사조차 밖에서 사 먹어야만 했다. 출산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고, 예상대로 손이 꽤나 많이 가는 매일 울던 산모였다.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꼴리는 대로 살고 싶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물론 결혼을 하고 시댁이 생기면서 스스로의 기준을 다시 잡긴 했지만, 그 안에서 나만의 철없는 삶을 어떻게든 유지해나갔다. 나 하나만 보고 살고 싶었고 그게 삶의 이유였다.


'당장 오늘 죽어도 전혀 아쉽지 않은 삶을 살았노라'


곁에 다가 온 남편에게 너무나 쉽게 나의 울타리를 허용해주었다. 이게 컸던 걸까? 우리 둘 사이에 태어난 이 작고 가냘픈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시기와 질투, 그런 카테고리는 아니었다. 직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뼈를 묻을 생각으로 임하고 있는데, 갑자기 새로 들어온 상관으로 인해 모든 시스템이 바뀌어 버렸는데 그만둘 수 없단다. 그래, 나의 마음은 딱 저 상황이었다.




 아이가 돌 즈음되었을 때 남편의 지나가는 말에 나는 온몸과 마음이 차게 식어버렸다.

 

" 너 100일 때까지도 애 안 좋아했잖아 "


돌이켜보았다. 나는 정말 그 시기에 아이에게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가.

몇 날 며칠을 생각해보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을 보았다. 글과 사진을 보는데도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주로 사진을 보면서 그날의 날씨, 대화, 인물, 냄새 그리고 감정을 추억하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빈 껍데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 감정에 더 치우쳐 18개월이 될 때 까지도 새벽마다 남편을 붙잡고 울어댔다. 이 억울하고 피해받은 것 같은 기분을 탓할 이가 없어 애먼 남편만 잡았다.

"언제까지 현실 회피하고 살 거야"라는 그의 말에 더 무너져 내렸다. 18개월 고스란히 감정 쓰레기통 노릇을 묵묵히 해주며 지쳤을 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도망칠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는 이 현실이 너무나 벅차고 감당이 안 되어서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피해자야. 가해자는 이 아이야' 속에서만 맴돌고 내뱉지 못한 나의 어리석은 옹졸함이 명치에 박혀있었다. 아이가 잠들고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되어야만 나는 마른 눈물을 베고 긴 한숨을 덮고 누웠다.




늘 푸르른 제주 바다


49개월, 제주에서도 나는 여전하다.

하루하루에 치이고 남들 시선에 지레 겁먹어버려서 고이 접어 마음 속 제일 깊은 서랍에 넣어두었을 뿐.




 히뽀의 첫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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