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풀 Jan 12. 2023

또 섬을 떠난다.

세 번째 섬을 꿈꾸며

싱가포르, 웨스트코스트 파크 앞 번쩍이던 첫 신혼집



" 미안한데 자기야, 우리 한국 돌아가면 안 될까? "


첫 신혼집은 싱가포르 웨스트코스트 파크 앞 번쩍번쩍한 신상 콘도였다. 남편의 일로 하늘길 6시간 반 거리에 정착했다. 낯선 곳이 주는 짜릿한 새로움과 신선함에 막혀있던 오감이 시원하게 뻥 뚫렸다. 적응이란 걸 할 틈도 없이 날개가 돋았다.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푼돈도 벌고 마음 맞는 이들과 모임도 하고, '센토사 비치에 뼛가루 날려주소'라고 쓸 유언장까지 생각하며 지냈다. 탈조선을 외치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끝내게 된 캐나다 생활에 아쉬움이 컸기에 싱가포르는 나의 한을 풀어주는 해우소라 여겼다.


" 돌아가자니?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자니? "


가장의 어깨가 무거움을 이기지 못해 바스러져버렸다. 낯선 곳이 주는 무서움과 예상되지 않는 미래에 그의 오감은 굳게 닫혔다. 힘듬에 잔뜩 절여있는 몸으로 미안하다며 눈물을 닦아주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화가 오가기 전 그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잔잔한 미소, 눈가에 살짝 접힌 주름, 웃음기 머금은 입꼬리가 그려졌다. 이건 내가 상상하고 싶은, 그럴 거라 지레짐작한 그의 얼굴이었다.


지금 마주 보고 있는 얼굴은 흐릿한 눈동자, 생기 없는 피부, 애써 웃음 짓고 있는 한껏 작아진 입술이었다. 애써 외면했던 걸까 못 알아차린 걸까? 그냥 스스로만 생각하고 살았던 거다. 손이 달달 떨려왔다. 이 미안함과 창피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알게 모르게 그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눈물이 멈출 새 없이 계속 흘러내렸다. 무심함에 눈물이 났고, 떠나기 싫어 눈물이 났다. 후자를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독거리는 손길에 나를 보는 눈빛에 담겨있었다. 너의 마음 잘 안다고, 그래서 더 미안한 거라고.


그렇게 우린 첫 번째 섬을 떠났다.




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탈조선을 외치고 있다. 이 놈의 금리 때문에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어서 떠야 한다고, 대통령의 잘못도 잘 사는 먼 나라들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돈 없는 내가 잘못이라고, 어차피 없는 돈 한반도 아닌 다른 곳에서 없이 살겠다고 떠들고 다닌다.


나의 웅변은 제주에 터를 잡으며 잠잠해졌다. 한국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묘한 매력이 있는 이 감귤 국은 첫 섬의 아쉬움을 달래기 충분했다. 육지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마음먹으면 일 년에 한두 번은 볼 수 있는, 해외는 아니지만 해외 사는 듯한 마음가짐이 들게 하는 작은 섬, 제주.


" 투-고 전문 식당 하나 차리고, 숙소를 오픈하는 거야! 우리 숙소에서 자면 식당에서 밥 공짜로 줘야지. "

" 8살 되면 승마 가르치려고. 정서에 너무 좋대. 도민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지원금 받아서 다니더라고 "

" 스튜디오 겸 카페를 차리는 거야 마당이 꼭 있어야 해. 구옥 개조하면 좋은데, 경매 나온 물건 없어? "


불 꺼진 방, 새근새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BGM 삼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곳에서의 미래를 꿈꾸며 계획을 세우곤 했다. 이루어진 게 하나 없어도 그 자체로 핑크빛이었다. 언젠가 하나쯤은 하겠지!




핑크빛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3년 전 청약 당첨되어 분양한 아파트 대출로 인해 두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3년 전과 너무나 달라져버린 금리는 영끌족에게 상당히 가혹했다. 타닥타닥 계산기 두드리느라 바쁜 손 하나, 노트에 체크리스트 적는 손 하나. 서로 달리 바삐 움직이지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 이 섬을 떠나야 하는구나 '




10월의 제주는 핑크빛 베이지빛


제주의 늦은 가을은 핑크 뮬리가 춤추고 팜파스가 맞장구친다. 너른 들판을 마구마구 달리기도 좋고, 모기가 사라져 가는 시기라 김치에 밥 한 술이라도 꾸역꾸역 밖에 나와 자리를 잡곤 한다. 더움이 가시고 시원 서늘한 바람에 카디건 하나 걸치면 딱 좋은 이곳의 가을. 완벽하다.


" 안녕하세요, 입주청소 혹시 얼마 정도 할까요? "

" 저 23년도 신입 6세는 몇 명 정도 뽑을 예정인가요? "


제주에서 육지의 일을 진행하는 건 뭐 하나 쉽지가 않다. 전화는 왜 이리 안 받는지, 툭하면 직접 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라 하질 않나. 수화기 속 상대의 말 온도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들이 무례한 건지 내 마음가짐이 무례한 건지, 아무래도 속이 신명 나게 꼬인 모양이다.


" 이제 뭐뭐 남았지, 여보? "

" 이사 날짜 정하고, 짐 버릴 거 버리고. 또 뭐 있더라. "


뭐긴, 미련이나 버려야지.

굿바이, 주홍빛 섬.




 히뽀의 여섯 번째 글.

작가의 이전글 너의 소풍 나의 소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