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얼굴

by 물풀


어느 날 대학 친구에게 본인 유튜브의 인터뷰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어떤 내용인지 들어보니, 주변 친구들의 다양한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콘셉트로 영상을 제작하려고 한다고 했다. 나의 경우, 현재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다 낙향하여 시골생활을 보내고 있으니 20대 치고는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하여, 마침 서울의 거래처 미팅이 있어 다녀오는 참에 친구와 만났다. 코로나19로 뿔뿔이 흩어지고 연락도 희미해졌던 탓에 최근 근황을 업데이트하는 수다로 워밍업을 했다. 인터뷰는 적어도 내 생각엔 수월하게 마무리가 되었다.(다만, 나는 인터뷰의 내용이고 뭐고 상관없이 그저 아름답게만 찍어주기를 부탁했지만, 그 부분은 아무래도 합의가 잘 되지 않은 것 같다.) 몇 주 후, 가편집본이라며 약 10분 정도 되는 영상을 보내주었다.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 기이한 기분이 들 듯이, 나는 원래 내가 찍힌 사진이나 영상을 보는 것이 괴로울 정도라, 미루고 미루다 보았는데 어라? 왜 인지 그런 기분이 사라졌다.


대학 때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늘 저 무렵의 내 이목구비는 참 우당탕탕 붙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함께 찍힌 친구들의 얼굴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 신기한 것은 20대 후반인 현재의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 다들 사이좋게 합의한 듯 제자리에 꼭 맞는 이목구비를 달고 있다. 예전과 같은 얼굴이지만 묘하게 얼토당토않았던 것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사이좋게 합작하고 있는 생김새로. 수술이나 시술의 힘으로 달라졌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예쁘다 못나다의 이분법적인 미적 기준에서 달라진 것도 아니다.


퍼스널 컬러 테스트를 받고,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어보고, 아이돌 화장법을 부단히 시도해 보면서 20대를 실컷 소진한 우리들은, 20대 후반쯤 되면 자신에게 어떤 모양새가 잘 어울리는지 정도는 도가 튼다. 나의 베스트의 형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3월 개강날 대학 정문에서 새내기와 헌내기가 한눈에 판가름 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어설프게 생긴 기묘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나도 그랬었고).


피아노연주자인 지인 한 명은 유튜브에 업로드된 자신의 공연 영상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꽤나 자주 보여주어서 그의 대단한 자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때로는 심지어 그 영상을 보면서 나로서는 알 길 없는 음표의 세계에 잠긴 듯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이 경이롭게 느껴지면서도, 철저히 자기애로 구축된 공명심이라는 생각을 하며 탱천한 그의 모습에 내심 약간은 진담의 야유를 던진 적이 있다.


언젠가 시인 박준과 싱어송라이터 정밀아의 합동(?)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박준 시인이 시를 스크린에 띄우고 읽으려는 찰나, “이 시는 불을 끄고 낭독하면 훨씬 멋있습니다.”라고 하고는 관계자분들께 불을 꺼달라고 요청했다. 캄캄한 작은 강의실에서 우리는 훨씬 좋은 시를 읽었다. 그는 자신이 그 시를 짓게 된 에피소드와 연와 행 사이의 연결과 시구詩句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설명하는 것처럼 열을 띠며 이야기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시를 사랑하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싱어송라이터 정밀아의 노래가 이어졌다. 아주 작은 공간이라 스크린이나 음향 시설이 완벽하지 않은 공간이었는데, 그녀는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제 목소리가 정말 좋은데요, 음향 시설이 좋은 데서 들으면 진짜 훠얼씬 좋거든요. 좋은 소리로 들려드리면 좋은데 아쉽네요 하하”라고 당부한 뒤 노래를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피아노 연주자인 지인이 떠올랐다. 어느 모로 보아도 공연장에서의 베스트는 연주자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단숨에 나르시시스트 취급을 했던 내가 우스꽝스러워졌다. 어떤 것의 베스트를 꿰뚫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깊숙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단어들을 지나쳐 쓰고 지우고를 반복해 마침내 지어진 시 한 편과 몇 번이고 부르고 고쳐 썼을 노래 한 곡이 바로 그렇다. 잘 알지 못해서 사랑하게 되는 것들도 있지만,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깊어지는 사랑도 있다.


내가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된 이유는 그만큼 나라는 사람에 공을 들인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빼어나고 걸출한 모습이 아니더라도, 이제껏 지나온 도정의 축적을 알고 있기에 눈에 익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의 선명성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낫다. 주어진 시간 동안 세계를 일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최선의 베스트’를 찾아내는 일에 치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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