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레코즈 #2
유난히 우리 옛 얘기엔 동물들이 사람 노릇을 많이 한다.
두꺼비, 까치, 뱀, 노루, 사슴, 거북이와 물고기까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호사가적인 기질을 타고난 조상이라 그러려니 했다.
상팔자인 자들은 비스듬히 누워 부른 배 두드리며, 고단한 자들은 지나 새나 코 처박고 땅을 파며 각자의 바람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려니 했다.
한 마디로, 만들어낸 이야기려니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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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부터였어요. 펜스로 세워진 담장이 빙 둘러쳐진 마당에 혼자 날아들어온 제가 긴 겨울 흙을 덮고 봄을 기다리기 시작했던 것 말이에요. 봉오리에 옹기종기 옆자리에 맺혔던 많은 형제들은 어디로 날아갔을까요. 울 틈도 없이 눈이 오고 그것이 얼고 또다시 녹으니 봄이에요.
‘저어기 먼 산비탈에 살 때부터 엄마는 노상 얘기했었어요. 사람 손을 조심해야 한다. 그보다 먼저 그들의 시선을 살펴야 해. 눈에 띄면 그땐 끝이야. 첫 잎도 살며시 틔우고, 아닌 체하며 잎을 다소곳이 모으고 말이야. 특히 꽃을 피울 땐 반드시 귀한 화초 뒤에 숨어야 한단다. 그러고는 숨죽이고 지내다 씨를 머금을 때가 오면, 있는 힘껏 숨을 참고 가능한 머얼리 뱉어내야 해. 그 뒤엔 비명을 지르던 고함을 치던 마음대로 하렴. 하지만 저 담장 안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안심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바람이 불 때 저쪽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그런데 어느 날 재채기 같은 바람에 휩쓸려 그만 여기로 들어와 버렸어요… 어쩌겠어요. 엄마가 해준 얘기를 되뇌며 오싹한 봄이 시작되었어요. 담장 집 언니는 참 꼼꼼해요. 불현듯 오후 느지막이 나타나 마당의 온 잡초들을 꼼꼼히 뽑아내고 있어요. 그것도 뿌리째로요. 운이 없게도 저는 하필 화단 한가운데 떨어진 통에 매일매일을 떨고 보냈어요.
봄이 한창인 사월이 되었어요. 너 나 할 것 없이 싹이 트고 있어요. 저는 초조하게 제 주변의 화초들이 나보다 더 자라길 응원하며 두 손을 모았지요.
제 키가 이 집 강아지만큼 큰 오월에도 저는 뽑히지 않았어요. 이제 곧 유월이면 꽃을 피워야 하는데 어떡하나… 담장 집 아주머니가 정성 들여 심은 바다 건너온 장미들이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던 중 불현듯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어쩌면 나를 이름 없는 풀이 아니라 꽃나무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이 집 언니가 자기 손으로 직접 심었다고 착각하는지도 몰라. 여기에 꽃나무가 얼마나 많은데. 차라리 최선을 다해 꽃나무 행세를 하자. 근데 큰일이네 내 꽃은 색도 향기도 없는 걸.
걱정할 새도 없이 봄이 흘러 흘러 나는 꽃을 올려요. 귀리 같은, 호밀 같은 볼품도 없는 열매 같은 꽃을요. 오랜만에 동이 틀 무렵 언니가 마당에 나와 저에게 눈길을 주네요. 세상에나, 나는 거짓말도 잘 못하는데.
“어머나, 모르는 애가 자라길래 궁금했는데 드디어 꽃을 피웠구나. 애썼다 야.”
세상에, 언니는 다 알고 있었어요. 내가 날아들어온 풀씨라는 걸요. 직접 심은 꽃나무가 아니라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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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와서 엄마의 정원을 꾸려온 지 일 년 남짓, 며칠만 내버려 둬도 까치집처럼 어수선해지는 정원에 쭈그려 앉아 풀을 뽑아내다가 누군가의 얘기소리를 듣게 되었다. 오늘 일이다. 길고 긴 우기 끝에 마당이 구석이건 한가운데건 풀들이 배불리 먹어 튼실하다. 머리가 복잡해 해 뜨기 전부터 웅크리고 앉아 식사도 거르고 점심 나절까지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풀을 뽑아댔다. 잡념 없이 초록에 파묻혀 대여섯 시간을 보내니 혼이 나간다. 어느새 해는 머리 꼭대기에 걸리고, 와중에 그늘로 옮겨가며 여전히 풀을 뽑고 있다.
혼자 일을 하다 보면 혼잣말이 는다.
월세도 안내는 주제에 네가 왜 이렇게 뿌리를 박고 사니. 뿌리를 뻗으려면 저 혼자 살 일이지 왜 이렇게 씨앗들은 사방지천에 뱉어내니. 그래 너는 네 일을 해라, 나는 내 일을 할 거니까…
그러다 화단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풀을 마주치고, 절로 들려온 이야기가 바로 앞의 이야기다. 그러니 옛날이야기들은 조상들이 터무니없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사람살이의 현장과 밥벌이 터에서 저절로 낳아진 사실인 것이다.
틀림없다.
새벽부터 풀을 뽑으며 내가 보고 들었다.
심지어 풀조차도 사람 노릇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