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둑들을 봤다.
굵직한 에너지의 배우가 한 바가지나 나오는데도, 각자의 몫을 온전히 표현하면서 스토리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참 멋진 영화구나. '영화다운 영화'라는 말은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표값이 아깝지 않은, 흡입력있는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력과, 개연성이 있으면서도 희노애락이 담긴, 반전의 반전을 기하면서도 식사 후 개운한 디저트로 입을 씻듯, 약간의 통쾌함을 주는 마지막 장면까지, 영화다운 영화라는 느낌이었다.
중년의 사랑이 풋풋하고 애틋하게 그려진 씹던껌의 로맨스 구도도 참 흥미로웠는데, 후반부에 서로를 지키기 위해 주차장에서 총격씬이 기억에 남는다. 남자는 씹던껌을 지키기 위해 뒤따라오는 경찰들을 총으로 여러명 쓰러뜨리며, 어떻게든 여자를 지키려 노력한다. 이 때 뭔가 이전에는 해보지 못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로맨틱한 장면인데, 카메라와 스토리의 포커스가 남자와 씹던껌의 로맨스에 온통 집중되어있으므로 총에 맞고 나가떨어지는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찰1, 경찰2, 경찰3, ... 들의 죽음은 스러지는 잡초처럼 배경으로 지나갔다. 그런데 만약 포커스를 경찰1에게 맞춘 영화였다면 어떨까. 경찰 2에게 포커스를 맞춘다면? 한 장면에서도 어떤 이에게 주인공이라는 타이틀을 씌우는가에 따라 너무도 다양한 스토리가 탄생한다는 는것을 알았다.
지금 나는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의 포커스는 나 자신이다. 커다란 통창으로 된 창가 자리에 앉아, 꽤나 커다란 빵을 한참이나 맛있게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노트북을 꺼내 글을 쓰는 나. 그런데 조금만 시선을 넓히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
5분 전쯤 일어섰지만, 내가 카페에서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노트북을 꺼내 글을 적기 시작할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은 깔끔하면서도 트랜디한 옷차림의 여성은 나를 몇 번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그녀와 눈을 맞출 용기가 없어서 괜스레 다른 곳을 보았는데, 눈이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새로운 서사가 생겼을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뒤늦게 눈을 맞춰보려 했으나 그녀는 내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일어날 때 보니 외국인 여자였고,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저 여자는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이곳에 오게 된 걸까. 그녀는 어떤 시선으로 이 공간에 머물다 갔을까.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걸까, 아니면 해외에서 결혼해서 한국에 들어온 걸까. 옷차림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요즘 한국 트렌드를 담고있어서, 어쩌면 한국인 남편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스토리를 잠시나마 상상해본다.
그녀가 일어난 자리에 새로운 여자가 앉았다. 나처럼, 책을 한 권 들고와서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다. 곱슬거리는 짧은 단발머리가 그녀의 이마 위에 드리워져 있다. 신발을 벗고 등받이 소파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아까 외국인 여자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조금 궁금한 마음이 든다.
그 오른쪽에는 남자 두 명이 앉아있다. 같이 온 일행은 아니고, 각자 앉아 있다. 한 사람은 야구모자를 뒤로 돌려 썼다. 그리고 자주 들락날락 한다. 내가 빵을 먹을 때 몇 번 흘깃 보더니, 잠시 후 언뜻 쳐다보니 디저트를 주문해서 먹고 있었다. 주변을 조금은 신경쓰는듯한 모습. 그 모습을 숨기지 못하는, 조금 더 솔직한 사람.
다른 한 사람은 아주 댄디한 옷차림이다. 마치 소개팅룩처럼 옷을 아주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마치 무신사 잡지에 [오늘의 패션]지에 실릴 것처럼, 특별히 튀는 것 없지만 누가 보아도 잘 차려입은듯한 느낌의 옷이다. 그는 계속 전화를 한다. 미팅을 하는 걸까. 표정은 별로 좋지 않다.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다.
관찰을 해본다.
내 시선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그들의 시선을.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엑스트라로 앉아 있다.
내 삶 속에서 그들이 그렇듯이.
도둑들 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배경처럼 스러져가는 무수한 경찰1, 경찰2, 경찰3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했다.
포커스를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우리 모두 주인공이 되었다가도,
배경 속 지나치는 엑스트라일 수도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