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l] 불안

by mool

불안은 마치 내 정체성의 일부 같기도 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불안이라는 감각이 나를 집어삼킬 때의 느낌을 기억한다.


처음 기억은 5~6살 즈음이다.

유치원에 갔고, 무서운 선생님을 만났다. 단순히 무섭다기보다 그녀는 짜증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상냥한 눈길을 보낸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도 꽤나 선명히 기억나는 얼굴. 화장을 했지만 양 볼에 울퉁불퉁한 여드름 자국이 항상 있었고, 칼단발이었다. 매서운 눈매와 작은 입. 나는 그녀와 있을 때 늘 불안을 느꼈다.


불안이 가장 강해지던 시간은 매일의 점심시간이었다.

유치원에는 '잔반을 남기면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집에서 나는 자유롭게 자라며 "네가 먹고싶은 만큼 먹어.", "천천히 먹고 네가 다 먹으면 말해~ 그때 치울게."하는 느긋한 배려의 집안에서 자랐다. 어찌보면 밥상머리 교육이 좋지 않은 거겠지만, 다행히 집에서만 그랬다. 나가서는 엄마가 허벅지를 하도 꼬집으시는 통에 예절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치원에 가니 정해진 시간 안에 밥을 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밥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혼이 났다. 혼이 나는것보다 더 무서운 건 경멸을 담아 쏘아붙이는 유치원 선생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때면 나는 온 몸이 흔들거리듯 불안에 떨었다.


결국 밥을 배식 받을 때, 나는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밥 조금만 덜어주세요." 하였다가,

"아... 아주 조금만 더 주세요." 하였다가,

"아니, 조금만 덜어주세요." 하기를 반복했다.

다섯 번이고 열 번이고 반복했고, 반복 횟수가 늘어갈수록 나의 내면과 온 몸이 진동하듯 불안에 휩싸였다. 나는 말 그대로 휘청거리듯 흔들렸다.


그러면 그 유치원 선생이 내게 다가와 경멸어린 눈으로 쏘아보며

"얘 또 이러네."

하곤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니 어쩌면 기질일까.

나는 어렸을 때 스케지북에 그림을 그릴 때면 아주 작은 흰색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크레파스 특유의 질감 때문에 열심히 칠하여도 하얀 빈틈이 남기 마련인데, 나는 그것을 참지 못했다. 스케치북 한 면이 아주 꼼꼼하게 칠해질 때까지 크레파스로 흰색 빈틈을 찾아 촘촘하게 색칠하였다.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불안도가 높은 건 당연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이 완벽을 향해 나아간다는 건 불안을 동반한다. 나는 늘 흔들리며 살았다. 하고, 또 하고, 또 수정하고, 또 또 수정하면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어디 그 뿐일까.

나의 삶의 환경은 불안에 온 몸을 고스란히 노출시킨 상황이었다.

부모님이 가게를 차리시면서 매일 언성을 높여 싸우셨고,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소리없이 우는 법을 배웠다. 자는 척을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이후 중학생이 될 무렵에는 삶의 고단함에 흔들리던 어머니가 술에 취해 오는 날이 늘었다. 그후로 일주일에 6~7일을 술을 드셨고, 만취한 날이 대부분이었다. 괴로웠다. 자존심이 강했던 나는 그런 나의 상황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의 삶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고독했다. 나는 불안 속에서 매일 흔들리며 온 몸을 던져 살았다.


그러던 중학생 무렵 한계에 다다랐던 모양이다. 나는 창문에 뛰어내린다거나, 전기에 감전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 행동이 충동적으로라도 나온다면 곧 즉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뜬금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 죽지 말라고 한번 말해줄 수 있어? 약속해달라고 해 줘." 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친구는 영문도 모른 채 "죽으면 안 돼. 약속해!!"라고 했다. 나는 약속에 있어서도 강박이 있어서, 한 번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키고는 했다. 그 성향을 이용해 약속을 지켜야하니까, 죽지는 말자, 는 생각을 했다. 매일 밤 온 몸이 흠뻑 젖을만큼 식은땀을 흘렸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안이 높았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내 사정을 몰랐던 고등학교 선생님은 당시 성적이 좋으면서도 수업시간에 졸음을 참지 못하는 나를 보고 진지하게 "간 검사를 한 번 받고 오면 어떠니?"라고 하셨다.


"사실 새벽에 잠을 못 자요. 많이 불안해요. 마음이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나는 이렇게 말할 줄 몰랐고, 그저 배시시 웃으며 실없는 소리만 했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남에게 잘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실없이 밝지만 무언가 속이 깊어보인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내게 짐이 되는 줄도 모르고 술술 이야기를 받아들었다. 나는 '힘이 들어.'라는 이야기를 할 줄 모르는데, 친구들은 그런 말을 참도 잘 했다.


서른살이 되어 엄마가 위암 판정을 받으셨다.

"놀라지 말고 들어, 엄마 위암이래."

순간 마음이 화사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괴기하지만 사실이다. 오랜시간 미워했던 엄마가 술을 끊을 기회라 여겼다.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도 되지 않던 엄마의 알콜중독을 끊을 수 있게, 신이 기회를 주신 거라 여겼다.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술을 끊을 기회인가봐. 신이 기회를 주신 거야."

나는 그저 기회라고만 여겼다. 지인들과 통화를 하면서도

"그래, 얼른 낫고 막걸리 한 잔 하자!"

하던 엄마를 증오하고 미워하면서,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나였나보다. 1년 반 뒤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를 증오하는 나날의 시작이었다. 밥 먹을 자격도, 편히 쉴 자격도, 힘듦을 토로할 자격도 없다 여겼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사실을 마주하며 무너져내릴 때도, 나는 힘들다는 말을 못 했다. 친구들은 여전히 습관처럼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했다. 버거운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순간 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휴대폰을 멀찍이 떼어놓고 허공만 바라봤다. 내가 아무 대답이 없는데도, 친구는 계속해서 이래서 속상하니, 저래서 속상하니 하며 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도망쳤다. 사람들은 나를 원망했지만, 나는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도망치기 바빴다. 평생 갈 것 같았던 오랜 친구가 멀어지고 나니 오히려 편안함이 찾아왔다.


1년 4개월. 서울 토박이로 내내 서울에서 살던 나는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일도 그만두었다. 모아둔 돈을 조금씩 꺼내쓰며 생활했다. 너무도 할 게 없어서, 처음엔 어색했다. 동네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주인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삶의 작은 행복 조각을, 처음으로 손에 쥐어보는 기분이었다. 편안하고 즐거웠다. 종종 불안이 올라올 때에는 명상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불안을 바라본다. 때때로 불안에 잡아먹히기도 하지만, 이제는 바라볼 줄도 안다.


그리고 생각한다.

고생했다고, 살아주어서, 견뎌주어서,

참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