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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May 14. 2024

반성과 참회의 도시, 베를린

아픈 역사의 잔흔이 선명한 도시

To be proved right in thirty years,

you must be prepared to be called crazy during the first three weeks.

30년 안에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처음 3주 동안 미친 사람으로 불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Theodor Herzl


드디어, 베를린에 다녀왔습니다. 가장 먼저 자랑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저는 한국에서도 혼자 여행을 시도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 베를린에서는 혼자 돌아다녔습니다. 평소 ‘외로움’을 가장 두려워하는 편인데요. 베를린에서는 “이 정도 외로움이라면 자주 견디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 한국에서도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교환학생을 통해 제가 기대했던 건 언어능력 제고인데요. 사실상 자신감과 무모함 같은 것들만 느는 기분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베를린은 섹시한 도시가 맞았습니다. 예술가들의 생동감과 에너지가 잔뜩 묻어나면서도 아픈 역사의 잔흔이 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본 베를린은 역사 도시에 더 가까웠습니다. ‘다크 투어’로 가장 유명한 도시기도 하고요. 물론 저는 이 레터를 읽으시는 분들보다 독일, 유럽 역사에 문외한일 겁니다. 그래도 ‘유대인 박물관’의 특이점을 짚어본다거나 베를린에서 드러난 독일인들의 삶과 문화를 한국에 있는 분들보다는 조금 더 현장감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요. 독일의 현대사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만큼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한국인들이 독일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고요. 언젠가 피드백으로 “역사를 주제로 한 레터를 다뤄달라”는 독자(♥)분도 계셨는데요. 레터에는 자주 독일의 역사가 등장할 예정입니다.


여는 글에서 소개된 Theodor herzl(헤르츨)은 헝가리 출신 저널리스트로 ‘시오니즘(유대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유대인 박물관 전시에도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고요. 이 사람이 한 말로 오늘 레터를 열어본 이유는 베를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가 유대인 박물관이었기 때문인데요. 역설적으로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유대인 박물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깨부순 공간이라서 흥미로웠습니다. 말이 좀 복잡하죠? 유대인 박물관이라 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이미지는 꽤 단일합니다. 흔히 이런 ‘박물관’이라면 나치에게 탄압받았던 과거를 생생히 기록하고 기억하는 데에 중점을 뒀을 거라 예상하게 되는데요. 물론 그런 역할도 잘 해낸 공간이지만, 그 역할은 다른 박물관이 더 잘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 박물관’은 지금껏 유대인들이 이룬 것, 유대교의 역사 등을 자세히 전시해 두었더라고요. 다시 말해 유대인 박물관은 ‘독일 나치 시대 안에서의 유대인’을 전시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유대교와 유대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공간입니다. 유대인 화가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유대인, 유대교의 역사를 짚어보는 공간을 마련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렇다고 해서 아픈 역사를 모른 척하거나 못 본 체하지도 않았습니다. 위 사진은 유대인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낙엽’인데요. 관람하던 사람들은 유대인의 얼굴을 형상화한 벽돌을 밟으면서 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나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비명을 만드는 방식인 건데요. 이 방식은 관람자가 그저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죄의식을 가지게 되고 다시 이런 역사가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겪었을 고통, 유대인을 향한 편견과 핍박으로 얻었을 상처를 관람자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하는 건데요. 두 번째 사진은 관람자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느꼈을 고립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지은 공간입니다. 바깥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고 한 줄기 빛에 의존해야 하는 방인데요. 그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이들의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게 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동독, 서독 분단 이후 아우슈비츠 범죄를 대하는 각 지역의 자세를 나타낸 자료였습니다. 동독은 유대인 생존자들에게 보상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판단해 보상을 유예했답니다. 서독이라고 달랐을까요? 서독에서는 유대인들이 뺏겼던 자산, 금전적 보상 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희생자들에게 숱한 서류를 요구하며 국가와의 싸움을 반복하게 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치부인 현대사를 수도의 중심에서 고스란히 드러내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히 내보이는 태도가 왜인지 그 나라를 더 빛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 박물관은 베를린 시의회가 주도한 공공 프로젝트형 전시 공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무언가의 역사를 설명하고 기록물과 작품을 전시하는 데에 그쳤던 박물관의 형태에서 벗어나 색다른 방식으로 지어지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박물관을 보면서 저는 서울 한복판에도 과거 국가에 의해 희생한 이들을 기념하는 전시 공간이 지어진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세월호, 10·29 사태를 추모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만들어 낸 숱한 ‘갈등’이 눈앞을 스쳐 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겪은 일을 그 누구도 쉽게 왜곡할 수 없도록 서울의 중심에 기억 공간을 마련하면 어떨까요? 그들을 추모하고 싶을 때 맘껏 추모할 수 있고, 보는 이로 하여금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말이죠. 베를린은 되레 이런 방식으로 관광 사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 나라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제 나라의 품격을 세우는 셈인 건데요. 물론 한국은 아직 광장에 분향소 하나 맘껏 세우지 못하고 약속했던 세월호 추모 공원은커녕, 기억 공간조차 서울 시의회 앞에 엉성한 모양새로 서 있는 상황이지만요.



베를린 중심에는 베를린 시민들의 쉼터라고 불리는 넓은 공원 ‘티어가르텐’이 있는데요. 해가 뜨면 사람들은 돗자리 들고 달려 나와 일광욕을 즐깁니다. 오죽하면 베를린에 일광욕 의자도 있대요. ‘마우어 파크’라는 공원에서는 일요일마다 flee market을 엽니다. 예술가들은 일요일마다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판매하고 시민들은 그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건데요. 자꾸 서울과 베를린을 비교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유 공간은 부족하고 사람은 넘치는 서울에서 시민들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챙길 수 있을까요?


독일 통일 이후 동독 여러 지역의 빈집이 늘어나면서 베를린 일부 지역에서도 이른바 ‘슬럼화’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이민자와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리 잡으면서 활기를 띠게 되었고 베를린은 이제 ‘누구나 살고 싶은 지역’이 되었죠. 베를린 또한 한국이 지역 소멸 대책을 마련할 때 참고할 법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럽 국가 중에 ‘역사’ 속에서 당당할 수 있는 나라가 몇 군데나 될까?”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이 한 질문입니다. 프랑스도 문화유산 약탈로 따지면 마냥 떵떵거리기 쉽지 않은데 말이죠. 또 한 가지 의문, 근데 왜 독일만 이토록 반성하는 태도를 보일까요? 프랑스는 여전히 약탈한 예술 작품을 통해 떼돈을 벌고 대영제국을 형성할 정도로 식민지에 유서가 깊은 영국도 있는데 말이죠.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반성하는 태도가 독일 시민들의 시민 의식과 현 독일 GDP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하고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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