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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인선 Moon In Sun Aug 22. 2020

너 그러다 똥 된다.

시간 약속 강박증세를 알아차린 후, 엄마와의 상담

서른이 넘으면 내가 엄마의 든든한 응원군이 될 줄 알았는데, 서른여섯에도 여전히 엄마가 내 응원군이다.





그런데, 엄마.
나 어렸을 때 시간 약속에 대한 강박증 같은 게 생길만한 일이 있었나?


- 응, 뭐?

아니, 내가 유난히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큰 것 같아서.

내가 그 순간의 화를 못 참더라고.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그날 저녁 나는 당근마켓이라는 중고상품 직거래 모바일 앱으로 사이즈가 작아 더 이상 입지 않는 원피스를 팔기 위한 약속이 있었다.

약속 시간을 정하는 처음부터 상대는 일정을 애매하게 말했다.

어디서 언제 뵐까요?

- 내일 저녁 아니면 모레 저녁쯤 지하철 역 앞에서 봐요.

내일 또는 모레 언제가 편하세요?

- 그럼 내일 저녁으로 하죠

시간은 언제가 좋으세요?

-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요.


나는 당일 점심 전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오늘 뵙기로 했는데, 몇 시쯤 뵈면 좋을지 알려주세요. 시간 맞춰 나가도록 할게요.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답장이 돌아왔다.

- 일 끝나기 전에 말씀드릴게요.

오후 5시, 6시가 다 되어도 메시지는 없길래, 보통 이렇게 약속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던 터라 나는 오늘 약속은 없어졌다 생각을 하고, 저녁을 먹고 치우고 잠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저녁 6시 30분에 메시지가 딸랑- 하고 울렸다.

- 6시 50분에 봬요!

집에서 약속 장소까지 걸어 나가려면, 15분.

약속시간에 맞춰나가자면 서둘러야 했다.

10분을 늦춰서 7시에 보자고 할까, 하다가 됐다 조금 서두르면 되지, 생각하고 알겠다는 답장을 하고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시간은 6시 45분, 상대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

- 죄송해요.

네?

- 7시에 봬요.

다 왔는데요.

상대는 답이 없었다. 그때 순간 화가 치솟았다. 나는 이렇게 적었다.


5분 전에 10분을 미루셨으면 사정을 설명해주시는 것이 예의 같습니다.

- 바로 갈게요!

2분 후 곧 사람이 나타났다.

"아, 마무리하는데 손님이 정리가 안되어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나는 이미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속으로 원피스는 그대로 집에 가져가도 된다고 생각했다.

10분을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지각을 하며 이유 없이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태도가 무례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원피스를 좀 보겠다 했고, 나는 말없이 보여주었다.

잔돈이 있느냐 물어서, 없다고 대답했다.

편의점에서 돈을 거슬러 갖고 나온 상대가 먼저

"죄송합니다. 화나시거나 오해하셨다면, 기분 푸세요.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네, 감사합니다.

진심 없이 답하고 등 돌아오는 동안에도 내내 화가 식지 않아 잠시 씩씩거리다가 집 앞 편의점 모퉁이를 돌 때쯤 압력솥의 증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모든 화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아,

같은 상황에서 상대는 내게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사과를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열을 내었지.

저 사람도 기분이 나빴을 텐데.

나는 대상이 누구든 간에 내 감정의 표출이 먼저이구나.

나는 아직도 왜 이렇지.

내가 언제부터 이랬지.


집에 들어와 손을 씻고 냉장고에서 어제 마시다 남은 와인을 꺼냈다.

학교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지각하는 친구가 싫어 매일 술자리 앞에서 잔소리를 퍼부은 나였다.

회사에서 유관부서와의 미팅에서도 5분씩 늦는 사람이 있으면, 싫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내 미팅은 늘 약속시간보다 5분에서 2분이라도 먼저,

협력사와의 외부 미팅에선 최소 15분 먼저 건물에 도착하고는 했다.

늦으면 이동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얼마나 늦는지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이렇게 하니, 상대도 이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들이 그렇지 않아 매번 쉽게 화가 났었다.


뭐지, 이건 시간 약속에 대한 개념보다는 강박증세 같은데.

이상한데, 하는 생각과 불안한 마음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이 떠올랐다.


한 명은 철기 차장님.

바쁘고 정신없는 회사 생활 속에서도 약속한 대상이 늦게 나타나면, 늘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웃으며

괜찮아요, 다 같이 바쁜데. 뭐 드릴까요, 물? 녹차? 커피?

하고 말하던 나의 사수.


다른 사람은 우리 엄마.

나처럼 불같은 성격이었지만, 마흔 중반부터 사회복지학을 뒤늦게 공부하고, 이제 중고등학교 단체 교육 및 심리 상담을 해주는 선생님이 된 엄마.

너희 키울 때 이런 공부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나도 너무 모르고 어려서 제대로 못한 것들이 많아 아쉬워.

하고 말하는 울 엄마.




엄마, 뭐 하고 있었어?

- 호호호~ 새우깡 먹고 있어.

아이, 이 시간에 새우깡 왜 먹어, 밥을 먹지.

- 밥 먹었어, 출출해서~

목 아픈 건 어때?

- 많이 좋아졌어. 스트레칭 꾸준히 해~


그런데, 엄마.
나 어렸을 때 시간 약속에 대한 강박증 같은 게 생길만한 일이 있었나?


하고 나는 물었다.


엄마는 징검다리를 건너듯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복기하듯이 음 음 음 하는 소리를 내다가,

- 글쎄, 너 학교 다닐 때 트라우마라고 할만한 거 너 그때 중학교 때 한문 가르치던 담임선생님하고 갈등 컸던 거 정도 아니니?

- 근데 그렇다고, 그때 니가 시간에 대한 강박이 생길건 없었어.

- 대학교 때 너 술 먹고 새벽에 들어와도 나나 아빠나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잖아.


하긴, 그렇네.


- 근데 인선아 너 그런 거 있잖아. 너 니 계획대로 안되면, 못 참는 거.

- 너 항상 계획 세우면서 시간별로 지내려고 막 그랬었잖아.

- 세워둔 계획대로 안되면 화내고 그랬지.


맞다. 이건 고3 수험생부터, 대학시절 내내

동아리, 학생회, 아르바이트, 저녁에 술 모임까지 아등바등 다 하겠다며 살았던 때부터 생겼던 습관이다.

지금도 일이 잘 안 풀리고,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주간 계획표와 일간 계획표를 세우기 시작한다.

그게 작심삼일이든 삼개월로 끝나든 간에.

그것 때문인가.


- 아니면, 인선아. 너 그런 것도 있잖아. 니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 니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나는 거 아닐까?

- 근데 그러지 마. 다른 사람 시간도 다 중요해.

- 다들 중요한 시간인데 어쩌다 늦는 거잖아. 각자 상황에 따라. 그거 화낼 일 아니야.


엄마는 지난 시간 상담교육과 상담 선생님의 경험을 십분 살려서

약 15분간 나를 상담하고 훈계하고는 이렇게 전화를 마무리했다.


인선아, 너 사회생활하면 더 그러면 안돼.
그러다 똥 된다.
사람들이 똥 무서워서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사람들 관계가 어디서나 제일 중요한 거야.
관대해져야 해.



엄마의 '너 그러다 똥 된다'는 표현이

가슴이나 머리를 탕 하고 후벼 팠지만, 너무 직설적으로 와 닿아서

일단 웃음이 나왔다.


그래 알겠어, 알겠어.

- 똥 되지 마. 조심해야 해.

알겠어, 알겠어요.

- 똥 안되게 조심해야 해, 관대해져야 돼.

알겠어요, 알겠어.

알겠다는 말을 서너 차례 반복하고서야 통화는 끝났다.


나는 와인을 한잔 더 따르고, 그리고도 부족해 찬장에 있던 위스키 미니어처를 찾았다.

얼음이 없어 한잔만 마시고 그만두었다.


시간에 대한 강박증세가 있던 걸 지난 십오 년간 모르고 살았다.

모르는 새에 상대방이 당황하도록 화를 내고 지나가는 순간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관대한 상대만 만나고 살아왔나 보다.

어떻게 이걸 모르고 살았을까, 정신과 상담을 받아봐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까 엄마가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근데, 인선아. 괜찮아.

지금이라도 알아차렸으면 돼.

이제 알았으니까,

같은 상황이 오면 의식하고 화내지 않도록 알아차리면 돼.

알았으니까, 이제 의식하고 고치면 돼.



역시 엄마는 엄마다.

그러게 오늘은 엄마가 제일 좋은

상담 선생님이었네.

이제 나도 똥 말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보자.

취한 술에 잠이 잘 오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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