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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인선 Moon In Sun Feb 21. 2024

아기는 제 시간과 에너지를 먹으며, 웃음을 줍니다.

그렇다면 쌤쌤으로 봐야 할까요? - 마흔에 쓰는 육아일기


작년 11월, 19개월 아기랑 어린이집 하원 후 종종종 산책 중.





오늘은 오랜만에 운이 좋은 금요일 밤입니다. 


남편이 빠른 퇴근을 했고, 저녁 낮잠을 아기가 자지 않았고, 밤 10시 반, 아기와 남편이 함께 나란히 곯아떨어졌습니다. 같이 잠에 들까, 몸을 일으켜볼까 왔다 갔다 고민하던 저는 식기 세척기가 다 돌아갔으니 문이라도 열어두자, 하는 마음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어요. 식세기 문을 열고, 다 돌아간 세탁기의 옷들을 건져내고, 수건을 넣어 삶음 코스로 돌립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사두었던 와인을 오픈했습니다. 


아기 때문에 와인을 튼튼한 유리컵에 먹는 습관이 생겼는데, 찬장을 열어 유리컵을 꺼낼까 하다가 얇고 가녀린 와인잔을 꺼내 봅니다. 절반을 가득 따르고 노트북을 열었어요. 블루투스 스피커의 볼륨을 최대한 작게 하고, 유튜브가 추천해 주는 ‘혼자 보내는 조용한 연말, 분위기에 취하는 칠 앤 그루비 플레이 리스트’를 틀어봅니다. 


이 짧은 밤. 혼자 보내는 정말 오랜만의 밤 11시 30분. 

이것 만으로 저는 운이 좋은 하루를, 2월을 보냈어요.


아이가 깨면 후다닥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아이의 가슴팍을 토닥토닥 두드려야 합니다. 그 초조함이 와인을 자꾸 벌컥벌컥 들이켜게 하네요.


오늘 저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일을 하다가, 함께 일하는 분과 커피를 잠깐 마시게 되며 하원을 늦게 했어요. 아이의 하원 시간을 정확히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이 일을 시작한 분과의 티타임도 필요한 시기였거든요. 오랜만에 어른과 두런두런 대화를 하다 보니, 35분도 쑥 지나가더라고요. 평소보다 45분쯤 늦은 하원.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동동 거리며 기다리고 있는데, 22개월 아기가 활짝 웃으며 나오네요.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돌아오는 길. 오후 3시만 되면, 어린이집 초인종 소리에 엄마, 엄마를 외친다던 아기가 어느새 어린이집 생활에 잘 적응한 것 있죠. 엄마가 평소보다 30분, 45분을 늦어도 아기는 이제 익숙한 어린이집에서 선생님과 시간을 잘 보내나 봅니다.


아기의 목욕은 남편이 담당하고 있는데, 오늘 저녁 목욕에 남편이 “서후, 까꿍 하는 것 좀 봐.” 하고 부릅니다.

아기가 나뭇잎 같은 작은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양 옆으로 활짝 펼쳐 보이며 ‘까꿍’합니다. 아기 신생아시절부터 무릎에 앉혀두고 내가 해주던 까꿍을 아기가 스스로 하며 까르르 웃네요. ‘서후야’ 하고 부르면, ‘응’ 하던 대답도 저번주부터 갑자기 ‘네에’로 바뀌었어요. 


엄마의 능숙함과 열정의 정도와 무관하게 아이는 이토록 잘 자라고 있었네요. 

새삼 고마운 마음입니다.  


둘째는 생각 없냐고 묻는 주위 사람들의 질문에 저는 자주 “아우, 생각 없어요. 얘만으로도 벅차요. 지금도 제 인생이 사라지는 기분인데, 애기가 둘이면 제 인생은 어떡해요. 저는 자신 없어요.”라고 자주 대답해 왔는데, 아기의 까꿍에 문득 죄책감이 크게 찾아들었어요.


‘내 인생이 사라지는 기분’. 

내 웃음과 행복을 온통 책임지고 있는 아이에게 저런 생각이 들었다는 걸 알면, 나중에 무척 서운해하겠지요. 

아기는 제 시간과 에너지를 먹으며, 저에게 행복과 웃음을 가득 채워줍니다. 쌤쌤으로 봐야 할까요. 낳지 않았으면 몰랐을 새로운 우주에 들어왔고, 동시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저 혼자만의 우주에서 퇴소하여 버렸어요.


늘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던 저는 참 여전하네요. 돌아가지 못할 우주와 지금 행복한 우주 사이를 재며, 한 곳에 깊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어요. 습관 같은 것이겠죠.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글을 씁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가 하고 싶던 이 일. 저는 꾸준히 글을 쓰고, 종종 그림을 그리고, 매일 요가를 하며 지내고 싶습니다. 글, 그림, 요가. 이 세 가지가 저 스스로에게 의미와 가치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하거든요. 직장을 다니면서도 사사로운 핑계로 꾸준하지 못했으면서, 아기를 탓하면 저는 너무 못난이예요. 저는 여전히 게으르게 하고 싶은 일을 열망하며, 드문드문 끄적이며 지냅니다.


달라질 수 있을까요? 


요즘은 꾸준함이 쌓이면 얼마나 달라질까,를 상상하며 지냅니다. 모르는 길이니까, 나도 부러운 누군가처럼 꾸준히 해보자고 다짐하며 게으르게 실행에 옮겨봅니다. 


달라질 수 있겠지요. 


아기에게 네가 원하는 삶을 살라고, 꿈은 꾸는 대로 이뤄지게 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제 꿈부터 제가 원하는 삶부터 찾아야겠지요. 


‘자기 꿈과 삶이 중요한 엄마’.

저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22개월 아기와 함께 책을 읽는 일상.

읽다 보면, 쓰다 보면, 점점 좋아질 것이라 믿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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