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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4번 며느리

by 책방별곡

새벽 6시,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부엌 불빛이 켜지고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됐다. 나보다 먼저 움직이는 시어머니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구운 조기와 나물, 산적, 전, 과일들이 식탁 위에 줄지어 있었다. 나는 말없이 앞치마를 두르고 제기에 음식들을 담기 시작했다. 기름 냄새가 코끝을 매캐하게 자극하고 쌓아 올린 전들이 제기에서 떨어질 때마다 얼굴에 땀이 맺혔다. 그렇게 첫 차례 준비가 끝나면 시계는 이미 아침 여덟 시를 향하고 있었다.

시댁의 차례는 늘 분주했다. 절을 하고 지방을 읽고 상을 정리하는 일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며느리는 부엌에 서 있어야지'라는 오래된 관념이 여전히 유효했다. 눈치껏 움직이며 빈 접시를 치우고 국을 데우다 보면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차례가 끝나고 음복이 시작되면 남자들은 거실에 모여 술잔을 기울였고 여자들은 여전히 부엌에서 서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아홉 시. 하지만 내 일은 끝나지 않았다.

시댁에서 쉴 새도 없이 큰집으로 이동하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았지만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또다시 같은 음식, 같은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반복된 그 풍경 속에서 ‘며느리 4번’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명절이 시작되기 전 '이틀만 참자.' 다짐하던 말이 스스로에게 서글펐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추석에 그 의무감이 사라졌다. 시아버지가 설날에 다 모인 자리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며느리들도 각자 일을 하니 차례는 올해부터 생략합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얇은 비닐막처럼 내 몸을 감싸던 긴장과 서글픔이 찢어지며 사라졌다. 오랜 기간 나를 눌러왔던 명절의 무게가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추석 당일 아침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눈을 떴다.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커피를 내리고 거실에 앉았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그동안 명절을 ‘보냈던’ 게 아니라 ‘버텼던’ 거라는 걸.

올해의 추석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내 마음에는 해방감이 깃들었다. 기름 냄새 대신 커피 향이, 분주한 목소리 대신 라디오의 느긋한 음악이 집 안을 채웠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쉬는 추석’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전 냄새 대신 가을 냄새가 나는 추석.
그 자유로움이 올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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