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 수가 없다

성실한 가장은 어떻게 연쇄살인마가 되었나

by 책방별곡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서늘한 농담처럼 시작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부터가 지독한 역설이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제지 회사 과장 만수(이병헌)가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하나둘 제거해 나가는 과정은 생계라는 이름 뒤에 숨은 자본주의의 민낯을 섬뜩하게 까발린다.

​주인공 만수는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보던 광기 어린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그는 그저 첼로를 켜는 딸의 레슨비가 걱정되고 아내 미리(손예진)에게 안락한 집을 지켜주고 싶은 슬픈 가장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 행복'을 수성하기 위해 그는 손에 도끼를 든다. 그가 경쟁자들을 처리하는 방식이 점차 능숙해지고 심지어 시체를 종이 박스처럼 패키징 하는 장면은 기괴하고 섬뜩하다.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은 살인의 현장이 아니다. 그 모든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어쩔 수가 없었어"라고 자위하는 만수의 표정이다.


​아내 미리(손예진) 또한 이 잔혹극의 단순한 관객이 아니다. 남편의 광기를 눈치채고도 묵인하거나 혹은 기묘한 방식으로 공모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 가족이 지키려던 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품위 있는 생활 수준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만수는 그토록 원하던 재취업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가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AI 소등 시스템에 의해 불이 하나둘씩 꺼지는 장면이 압권이다. 시스템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데 성공했지만 그 시스템(AI)은 그를 언제든 다시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차가운 은유처럼 보인다. 불 꺼진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은 만수의 모습은 승리자가 아닌 거대한 기계 부속품처럼 보잘것없어 보인다.

소름끼치는 건 나 역시 그런 인간이라는 점이다. 안락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못 본 척 지나쳤고 지금도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고 있다.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말이다.

p. s. 안녕하세요, 책방별곡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 영화의 명장면은 무엇인가요? 댓글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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