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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가지 못했다 그곳에.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를 읽고-

by 책방별곡

중고등학교 시절 인 서울이라는 목표를 위해 경주마처럼 달렸다. 수능 당일 불안이 심해서 우황청심환을 먹고는 1교시 언어영역부터 엉망으로 끝냈다. 열 문제 넘게 찍었던 것 같다. 문제가 읽히지 않았다. 겁쟁이라 재수는 하기 싫어서 점수 맞춰 원치 않은 대학에 들어갔다.


패배감에 찌든 인간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수업을 째고 산성 막걸리를 마시러 다녔다. 당연히 학점은 엉망진창이었다. 재수를 할까 1학기 성적을 보며 고민했지만 그 무렵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그럴 수 없었다. 정신 차리고 망해가는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돼도 안 한 사명감? 에 젖어서 열심히 구멍 난 학점을 메웠다.


하지만 줏대 없이 촛불처럼 흔들리던 나란 인간은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아닌 고시의 길에 들어섰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시점에 고시를 해야겠다고 식구들에게 선언했다. 합격해서 절망에 파묻힌 엄마의 희망이 되고 싶다는 구세주 가면이 날 옭아맸다.


사법고시는 합격까지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5급 사무관이 된다는 행정고시에 도전했다.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는 말은 진리였다. 공부도 안 하고 시험을 쳤는데 학교 고시반에 수월히 들어갔다. 그래서 우습게 봤다. 빡세게 2년 정도 하면 붙을 줄 알았다. 고시반에서 1년을 보내고 과욕을 부려 서울 신림동에 입성했다.


입성 후 6개월도 안돼서 우물 안 개구리의 오만함은 산산조각 났다. Sky캐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스터디 모임을 만들고 쨉도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1차 PSAT 시험은 주입식 공부처럼 달달 외운다고 점수가 잘 나오는 과목이 아니었다. 현실을 직시했지만 부모님께 호언장담했기에 2년을 새벽 강의를 들으며 열심히 꾸역꾸역 버텼다.


밤이 되면 끝이 안 보이는 캄캄한 구멍으로 계속 떨어지는 악몽을 꾸게 되었다.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속 주인공들처럼 나는 가지 못했다 원하던 그곳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공기업 준비를 했지만 면전에서 몇 번의 고배를 마시니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서둘러 결혼으로 도망쳤다.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며 10년간 요리조리 도망쳐 다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꼬물이는 어느새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이제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들이 불안감을 키워온다. 뭘 해야 하지? 도대체 뭘???


앞자리는 바뀌었고 일한 경력은 6개월이 전부이며 결혼 전까지 공부만 했다. 내가 꿨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모르겠다. 불안하니 남들처럼 이것저것 자격증은 따고 있지만 그게 다일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회의감에 젖어있을 때 이 그림책을 읽으며 주인공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동물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하지만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게 아등바등 애쓰지 마라고, 적당히 살아가라고 토닥이는 그림책이다. 어린 시절 <브레멘 음악대>를 읽으며 동물들이 꼭 브레멘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이제는 아니다. 그곳에 가지 못하더라도 지금 이곳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꽤 괜찮은 삶이다. 현실에 안주했다고 실패자라고 욕 할 것인가? 뭐 어때, 어차피 내 인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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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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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당신들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할 일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2020년 제26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제26회 황금도깨비상을 수상한 루리 작가의 첫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가 ㈜비룡소에서 출간되었다. 이 그림책은 그림형제의 「브레멘 음악대」를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하여 독특한 화면 구성과 세련된 일러스트로 풀어낸 수작이다. 다소 무겁고 우울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위트와 재치로 재미를 더했다.


-출처 예스24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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