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쀼의 세계

-거짓말괴물에게 먹힌 남자-

by 책방별곡

어느 날 신랑이 고등학교 친구의 집들이를 가자고 했다. 결혼 전 남편 친구들과 만나서 술 한잔 마신 적이 없었다. 안면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임신 8개월 차라 컨디션이 엉망이었지만 퉁퉁 부은 몸을 이끌고 따라나섰다. 낯가림이 심하고 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지 않는 나였다. 새로 지은 30평대 아파트 현관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인사했다. 그때 활짝 웃으며 휴지를 받아 든 그와 만났다. “무겁죠? 저 주세요. 너는 임신한 사람한테 이런 걸 들게 하냐?”


둥글둥글 순박한 인상에 어색해서 뻘쭘하게 서 있는 나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싹싹한 성격이었다. 그날 집들이 메뉴가 뜬금없이 삼겹살이었다. 그는 집게를 한 번도 넘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다 먹을 때까지 묵묵히 고기를 구웠다. 착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랑에게 ‘그분 인상이 순하더라, 성격이 좋은 것 같아. 부인은 좋겠다 그런 남자랑 결혼해서~.’라고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남편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지 질투 섞인 목소리로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별로 없다며 하지만 착한 친구라고 했다.


두 번째로 그를 본 건 그 사람 아이의 돌잔치에서였다. 몇 년 만에 다시 봤지만, 예전과 똑같이 서글서글하고 순박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입에 경련 오겠다는 걱정이 될 정도로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그를 보며 ‘선한 사람은 행복할 자격이 있어.’ 그런 어쭙잖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돌잔치의 하이라이트는 타인인 나도 눈물이 날 만큼 감동이었다. 그가 아내에게 나랑 결혼해서 일 년 동안 아이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내용을 길게 아주 길~게 자필로 쓴, 편지지 세 장이 넘는 분량으로 낭독하는 이벤트였다. 마냥 그 아내가 부러웠다. 나는 결혼 중에도 연애 중에도 제대로 된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사랑의 고백을 듣다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살 면서 꺼내 보는 예쁜 추억이 될 듯했다.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목소리로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과 그 친구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정말 로맨티시스트다, 아내는 너무 행복하겠다, 나는 뭐가 부족해서 편지 한 장 못 받는 거냐, 기분 나쁘다, 내가 불쌍하다 등등. 끝이 나지 않는 푸념에 짜증이 제대로 난 남편은 갑자기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 새끼, 완전 쓰레기야, 쉬지 않고 채팅으로 여자를 만나. 지금도 유부녀와 바람피우는 중이거든."


처음에는 질투하는 건 줄 알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이랑 부인을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거짓말이지?"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신랑은 쯧쯧 혀를 차며, 나보고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상세하게 그의 바람피우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2대 2로 유부녀들과 소개팅을 했었다. 그 이후 일 년이 넘도록 만나는 중인데 식당을 운영하는 여자가 그 형에게 목을 매고 있다. 만날 때마다 선물 공세에 십만 원이 넘는 용돈을 준 단다. 어린이날은 친구의 아이 장난감까지 사줬다. 상간녀도 미친년이 분명하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집들이와 돌잔치 두 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재수 없는 바람둥이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제 시골에서 상경한 시골 청년의 모습, 딱 그런 느낌이었다. 거짓말은 전혀 할 줄 모르는, 다른 사람을 속인다면 얼굴에 다 티가 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세상의 남자들은 바람을 피우고 걸리는 남자와 안 걸리는 남자 이렇게 두 부류라 더니! 그런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은 순한 양의 탈을 쓰고 속은 능글거리는 늑대가 100마리쯤 앉아있는 걸까? TV에 나오는 불륜 사연보다 수위가 높은 에피소드를 집에 도착할 때까지 신랑에게 들었다.


어느 날은 불륜이 들킬 뻔한 적도 있었단다. 계속 킥킥거리며 카톡만 해대는 모습이 부인의 레이더에 걸렸다. 참 눈치도 없는 친구이다. 그래서 아내가 당장 통화 내역을 발급해서 오라고 통보했다.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으며 심부름센터에 30만 원을 주고 발급한 통화 내역서를 조작했다. 죄책감 따위는 그 친구에게 없단다. 얼마나 바람을 많이 피웠으면 이렇게 철저한 걸까? 여태까지 내 마음속 ‘일반인 최수종’이었던 그가 똥,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가 됐다. 세상 모든 여자에게 찝쩍댈 거면 결혼은 왜 한 거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의 아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한 살배기 아이를 안은 채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조만간 거짓말 괴물에게 잡아 먹힐 것이다. 아니다 이미 괴물에게 먹혀버렸는지 모른다.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을 하지만 계속해서 완벽하게 아내를 속일 수 있을까? 보다 못한 누군가가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줄 수도 있다.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하고 부부 사이에도 비밀은 존재한다지만 불륜은 끔찍하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악녀 메데이아는 자신을 배신한 남편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상대녀를 죽이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도 제 손으로 죽인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나는 그녀의 살인 행위가 이해된다. JTBC 화제작 《부부의 세계》의 김희애도 바로 이 메데이아를 모티브로 했단다. 그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로서 김희애가 복수할 때마다 짜릿했다.


배신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한다. 바람피운 배우자의 남편과 아내들은(이혼하지 않은 채 참는다면) 그 고통이 희미해질 때까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아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랬으니까.) 불륜은 몇 천 년간 이어지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다. 제약회사가 부부 사이에는 거짓말을 못 하게 하는 약을 개발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약이 나온다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걸까? 모르고 살아가는 게 오히려 나으려나? 도대체 부부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짓말이 필요한 건지 누가 명쾌한 해답을 내려줬으면 좋겠다.


연애할 때와 결혼하고 5년까지는 남편의 핸드폰을 일일이 감시했다. 하지만 십 년이 넘어가니 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하지 않는다. 작은 거라도 꼬투리를 잡아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끝이 없는 부부 싸움을 하는니 차라리 눈감고 귀 닫고 무심한 채로 살아가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말을 하면 지인들은 그러다 뒤통수 맞는다 라는 충고를 한다. 그럴까? 남편도 거짓말 괴물에게 먹혔으려나? 그렇게 된다면 나는 메데이아 아니 더 글로리의 동은이처럼 치밀한 복수를 하련다.



-참고자료-

화면 캡처 2023-02-11 093200.png

메데이아와 그녀가 사랑한 남자 이아손


이아손은 왕위를 되찾기 위해 꼭 필요했던 ‘금양 모피’를 얻기 위해 원정대를 꾸려 콜키스에 온다. 콜키스의 왕은 그에게 ‘금양 모피’를 내어주는 조건을 하나 내걸었으나, 이는 인간인 이아손이 절대 해낼 수 없는 미션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첫눈에 반한 콜키스의 공주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금양 모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금양 모피'를 얻은 이아손과 함께 도망치는 그녀는 뒤쫓아오는 아버지의 추격을 막기 위해 동생을 찢어 바다에 내던져 버린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아손은 메데이아와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 듯했지만, 야심가였던 이아손은 그녀를 버리고 코린토스의 공주와 결혼해 왕위에 오르려 한다.

이아손의 배신에 복수를 결심한 메데이아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척하며 그가 자신을 믿도록 한 뒤, 코린토스의 공주를 독살하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인다.

이는 이아손에 대한 최고의 복수였고 그는 결국 지옥보다 더한 절망감 속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화면 캡처 2023-02-11 093510.png

-출처 다음 지식 하우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결국 가지 못했다 그곳에.